“그래도 공부는 됩니다.”
지난 1월 청와대 여민1관 집무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참모들이 티타임에서 “보고서 양이 너무 많다”고 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 문 대통령은 업무가 끝난 뒤 관저에 보고서를 들고 가서 늦은 밤이나 새벽까지 읽는다고 한다. 청와대 내부망에 올라온 보고서에 직접 주석을 달고,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수시로 참모진을 불러 묻는다. 또 회의 때마다 대통령의 질문 공세로 참모나 장관들이 진땀을 빼는 경우가 많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학구열에 맞춰 청와대는 출범 초기부터 ‘공부하는 청와대’가 됐다. 노무현정부 시절 운영되던 상춘포럼이 부활했고, 영어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동아리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살기 위해 공부한다’는 청와대 직원들은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점심시간 쪼개서 공부
2017년 5월 청와대 부속건물 상춘재(봄이 늘 계속되는 집이라는 뜻)의 보수 공사가 시작됐을 때 문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상춘재 이름을 따서 직원들이 교양을 쌓고 공부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다시 해보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노무현정부 시절 청와대 직원 학습 모임이던 ‘상춘포럼’이 재가동됐다.
그해 10월 25일 첫 포럼이 열렸다. 문 대통령의 경남고 동창인 건축가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강연자로 나섰고, 임종석 당시 비서실장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직원 500여명이 참석했다. 승 대표는 광장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광화문광장에서 북악산까지 사람들이 제약없이 보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춘포럼의 이름은 예전과 같지만 내용은 더 알차게 채워졌다. 공부 장소를 여민2관 체력단련실에서 영빈관으로 옮겼고,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노무현정부 청와대 행정관 출신인 백승권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는 지난 2월 포럼 강연자로 초청된 뒤 “과거보다 참여 폭이 넓고 참석자들 열기도 더 뜨거운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직원들의 상춘포럼 참석 여부를 연말 성과 평가에 반영하고 있다. 다만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포럼은 점심시간을 활용해 운영된다.
외교·경제 등 현안 강의
상춘포럼은 단순한 교양 강의에 머물지 않는다. 현안에 따라 직원들의 추천을 받아 강연자를 정하며, 문 대통령이 직접 추천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5월에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4·27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판문점 선언의 의미에 대해 강연했다. 이 강의에는 국가안보실 직원 다수가 참석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가 ‘고려 외교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이 교수는 강대국 사이에서 자존심을 지켰던 고려의 외교 전략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재의 한반도 정세와 연결되는, 의미 있는 강연이었다는 호평이 나왔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 강의도 이뤄졌다. 지난 1월 한인섭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은 1948년부터 87년까지 헌법이 9차례나 바뀌는 와중에도 전문에서 3·1운동 관련 내용이 빠지지 않은 점을 언급하면서 “국민의 자부심을 재확인하는 방식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일자리 문제가 불거졌던 지난 3월에는 경제 강의가 마련됐다. 조영철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현재는 고용위기 상황이 아니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자영업자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내수 활성화를 위한 확장적 재정정책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적극적인 재정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난달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적극적 재정정책을 주문했다. 포럼 내용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청와대에선 상춘포럼 말고도 전문가 초청 강연이 수시로 열린다. 지난해 9월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비서관·행정관 등 20여명을 대상으로 한국 산업 구조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강연 이후 이 교수는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이 됐다. 지난달 2일에는 나윤경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이 젠더 감수성과 피해자 중심주의의 필요성을 주제로 청와대 직원들에게 강의했다.
나랏일 하려면 공부는 필수
청와대 정책실 중심의 자율 공부 모임도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인사청문회’와 업무 관련 영어를 공부하는 ‘영미모’(영어가 미숙한 사람들 모임)이 유명하다. 특히 어학 모임은 매주 꾸준히 열린다. 각 분야 전문가가 모인 청와대지만 업무를 하다 보면 공부의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기에 책의 줄거리를 직원들끼리 공유하기도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을 모시고 나랏일을 하려면 공부는 필수”라며 “어떻게 하면 일을 보다 빠르게,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춰 공부 영역을 늘려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