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방문한 충남 천안 병천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에선 횃불을 든 댕기머리 유관순 조각상 뒤편으로 쓰러진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탈리아 로마의 성베드로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구도가 닮았다. 충청 지역 최대 만세 시위였던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서 일본 헌병의 첫 번째 총탄에 희생된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1887~1919)과 그의 어머니 최정칠(1853~1919)의 모습이다.
김구응은 성공회 병천교회가 세운 교육기관인 진명학교에서 18년부터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감리교회에서 세운 인근 장명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10년 이상 교사 생활을 하며 청년 학생 및 지역 유지들과 인맥을 형성한 그는 박병무 병천교회 전도사와 함께 대규모 만세 시위를 기획한다.
장동윤(41) 병천교회 신부는 “김구응 선생이 거사 당일 돌아가셔서 유관순 열사처럼 상세한 재판 기록은 없지만, 성공회 진명학교 학생 및 기독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대규모로 태극기를 제작해 시위를 준비했다는 증언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를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 목사는 20년 6월 펴낸 ‘한국독립운동사략’에서 김구응 모자를 이렇게 묘사했다.
“천안 병천시장에서 김구응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하여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 헌병이 조선인 기수를 해치고자 했다.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이를 막느라 피가 낭자했다. 일본 헌병이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나서 잔인무도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발사해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 김구응은 머리를 맞아 순국했으나 일본 헌병은 그의 사지를 칼로 난도질했다. 이때 김구응의 노모가 일본 헌병을 향해 크게 질책하자 노모마저 찔러 죽였다.”
이날 시위에선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도 일본 헌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 유중권은 머리와 허리에 자상을 입고 집으로 옮겨져 이튿날 사망했다. 유관순은 사촌 유예도와 함께 도피하다 집에서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는다. 유관순의 숙부인 유중무 역시 3년 징역을 살았다. 신원 미상자까지 19명이 사망했고 3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유중무는 ‘지령리야소교당’의 전도사였다. 지금은 용두리로 바뀐 유씨 집성촌 지령리의 감리교회였다. 조병옥 박사의 부친인 조인원 속장(구역장)과 함께 교회를 이끌었다. 조인원 역시 3·1운동으로 징역 3년에 처해진다. 아우내 만세운동의 또 다른 주역은 바로 이 지령리야소교당 교인들이다.
지금은 ‘유관순 기념 매봉교회’가 지령리야소교당의 명맥을 잇고 있다. 매봉교회는 67년 이화학당 출신들의 성원에 힘입어 유관순 생가 옆자리에 재건된 감리교회다. 매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 거사일에 기념예배, 유관순이 감옥 안에서 순국한 9월 28일에 추모예배를 드린다. 박윤억(62) 매봉교회 목사는 “유관순 열사에 비해 덜 알려진 유중무 조인원 선생 등의 업적과 한국교회의 독립운동 공헌 등을 알리기 위해 전시실을 확충하려 하지만 재원 부족으로 손을 놓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병천보다 북쪽인 천안 입장면 양대리에선 19년 3월 20일 감리교 학교인 광명여학교 학생들과 천안 직산금광 광부들이 합세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학교 교사 임영신은 서울 남대문교회 조사였다가 훗날 연동교회 목사가 되는 함태영(국민일보 3월 7일자 31면 참조)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고, 직산광산 직원이던 남편 이용사를 통해 등사기를 빌려 교회 청년들과 함께 밤을 새워 등사했다. 여학생 황금순(황현숙으로 개명) 민옥금(민원숙으로 개명) 한이순(한도숙으로 개명) 등이 선언서 배포를 담당했고 이들은 모두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훗날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이름 끝자리에 모두 ‘숙(淑)’을 넣어 ‘3숙 의자매’로 불렸다.
천안 서쪽 아산 염치면 백암리에선 19년 3월 31일 영신학교 여교사 한연순과 이화학당 여학생 김복희가 주민들과 함께 마을 북쪽 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닦던 그 동네다. 남성들은 태형을 받고 훈방됐지만, 주동자인 한연순 김복희는 각각 징역 3개월과 2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화학당 졸업을 앞둔 김복희는 공주감옥에서 후배 유관순과 조우한다.
양준석 백암감리교회 목사는 “출옥 후 김복희 사모는 남편 전재풍 목사를 만나 경기도 안산 샘골교회에서 목회를 함께한다”면서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배경인 바로 그 교회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이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