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그가 청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던 5만8000여통의 편지에 숱한 청취자들은 울고 웃었다. 매일 아침 9시5분, “라라랄라~” 경쾌한 시그널 음악이 들려오면 모두 귀를 기울였다. 시민들은 버스나 택시, 집 한편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따뜻한 위로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수 양희은(67·사진). MBC 표준FM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이하 여성시대)의 DJ로 활동한 지 20주년을 맞았다. 여성시대는 31년간 이웃들의 삶에 주파수를 맞추며 동고동락해온 채널 간판 프로그램이다. 1999년 6월 7일 첫 마이크를 잡은 양희은이 그간 애청자들과 호흡해온 시간은 무려 1만4600시간에 이른다.
4일 서울 마포구 MBC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여성시대(大)라는 학교에서 이 세상 어느 대학보다 많은 공부를 했다는 느낌이 든다”고 소회를 전했다.
“여성시대에 온 사연들은 대개 가볍기보단 묵직하게 감성을 눌러요. 이 프로그램의 힘은 그런 분들의 가슴에서 온다고 믿습니다. 전 그저 얘기가 잘 전달되도록 애썼을 뿐이에요.”
별다른 기교 없이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쓴 청취자들의 삶은 담백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소소한 기쁨을 전하는 사연도 있지만, 아픈 가족사와 가난 등 기구한 삶을 괴로워하는 청취자도 적지 않다.
“처음 시작했을 땐 사연들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어요. 때마침 갱년기가 겹치기도 했었고요. 어느 순간 깨달은 건 그런 이야기들이 청취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깨동무를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감은 사람들 사이에 힘을 주죠.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쉼터로 나오는 용기를 얻는 것처럼요.”
그러면서 그는 그간의 사연 중 “유방암 말기 어머니가 아들의 생일 축하 편지를 사흘에 걸쳐 보냈던 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20년간 한자리를 지킨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다. 원동력은 라디오에 대한 남다른 애정에서 왔다. “큰 재봉틀같이 생긴 라디오 앞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음악뿐 아니라 모든 정보를 라디오에서 배웠죠. 비주류 통기타 가수로 출발한 저는 라디오 출연이 편했고 (힘들 때면) 그 속으로 숨었었어요. 그런 의리로 지금까지 라디오 진행을 해오고 있습니다.”
정확히 20주년이 되는 7일에는 골든마우스상을 받는다. MBC 라디오에 20년간 헌신해온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양희은은 이종환 김기덕 강석 김혜영 이문세 배철수 최유라 임국희에 이어 아홉 번째로 이 상을 받게 됐다. 그는 소감 대신 앞으로의 다짐으로 답변을 갈음했다.
“긴 짝사랑을 해온 느낌이에요. ‘언제까지 할 것이다’ 그런 계획은 없어요. 다만 마이크를 놔야 하는 시기는 있습니다. 여성시대 DJ 자리를 힘으로 알고 휘두르려고 할 때죠. 사연들을 보면서 충고하고 가르치려 한다면, 그땐 당장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요.”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