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직장인에게도 1억원 연봉은 성공의 상징과도 같다. 1억원은 그 정도 벌이는 돼야 자기 소유의 집과 자동차에 가족의 생계를 여유 있게 책임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온갖 취업 경쟁을 뚫고 취직해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은 일해야 벌 수 있는 액수다.
그런데 요즘 대기업이나 전문직이 아니라도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블루칼라’ 일자리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사람들의 생활습관, 소비습관이 바뀌면서 다양한 서비스산업이 발달하게 됐고, 이에 고소득 일자리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넥타이와 셔츠, 양복 차림에 책상에 앉아 일하는 화이트칼라 직종에 비해 몸은 더 힘들지만 벌이는 더 많고 삶의 여유도 챙길 수 있다는 게 이들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실직자를 일으켜 세운 ‘이글윙’ 트럭
40대 후반인 A씨는 1년 전만 해도 아내와 두 자녀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20년 넘게 다니던 건설회사 샐러리맨 생활을 접어야 했기 때문이다. 건설공사 현장소장을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더 버틸 수가 없었다. 특별히 잘못 한 건 없었지만, 그렇다 할 특출한 실적도 없었다. 열심히 젊음을 바친 직장생활의 마지막은 밀려나듯 무언의 사표 제출 압박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건설 불경기에 다른 기업으로 옮기기도 힘들었고, 그렇다고 ‘내 사업’을 하기엔 자본금도 자신감도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에게 한 친구가 “요즘 ‘이글윙’ 트럭 뜨는데 함 해봐. 퇴직금은 있잖아”라고 했다. 그땐 이글윙 트럭이 뭔지도 몰랐다. 이글윙 트럭은 정확하게는 윙보디 트럭을 지칭하는 말로, 트럭기사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다. 마치 독수리날개처럼 열리는 문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일종의 ‘속어’로 중형인 5t에서 10t 대형트럭까지 다 설치가 가능하다. 이글윙 트럭은 ‘택배 전성시대’인 요즘 어떤 운송수단보다 더 ‘핫(hot)’하다고 한다. 외부 기온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각종 운송 물자를 보호할 수 있는데다 운송지 도착 후 물건을 실어나르기도 용이해 신속한 적재와 하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A씨는 한 달 동안 시장 조사를 한 뒤 퇴직금에 은행 아파트 담보대출을 쏟아부어 2억5000만원가량의 10t 이글윙 트럭을 구입했다. 아내가 무모하다며 만류했지만, 그렇다고 퇴직금을 까먹고 있을 순 없었다.
트럭을 주문한 뒤 거주지인 서울 광진구 근처의 택배회사 물류창고에 명함을 돌리고 수도권 인근 물류기지로 발품을 팔았다. 영 자신이 없었지만 일거리는 쉽게 따낼 수 있었다. 도시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도시로 운송되는 물류가 넘쳐났다. 첫 달은 거의 2~3일 빼곤 매일 일하다시피 했는데 수입이 2800만원 가까이 됐다. 다음 달부터 1주일에 하루 이틀은 쉬기로 결심하고 일했고 1년이 지나자 벌어들인 수입이 2억4000만원 정도였다. 이전 직장에서 받던 연봉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힘들죠. 새벽에 나가야 하는 날이 대부분이고, 밤일이 생기면 고속도로 길가 트럭 안에서 자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그래도 힘들게 일한 만큼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온라인 쇼핑이 낳은 고소득 직종들
A씨처럼 각종 물류를 운송하는 새로운 형태의 트럭 사업자들이 이에 속한다. 트럭 하면 건설자재를 실어 나르거나 기업 물류만 취급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요즘은 개인 소비자와 물류창고, 물류창고와 물류센터를 연결하는 중대형 트럭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택배회사 물류센터에서 각종 택배물을 분류하는 분류원 역시 고소득 블루칼라다. 대형 택배 회사들은 물류기지와 물류기지를 연결하는 대형트럭만 주로 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높은 차량 가격 때문에 이마저 개인사업자들을 참여시키는 곳도 흔하다. 따라서 물류기지에서 도시 내 소형 물류센터로 온 택배물을 분류해 소비자들에게 운송하는 일은 개인사업자가 도맡다시피 한다.
정규직으로 인력을 채용하는 게 부담스러워운 택배 기업들이 조성한 환경인 셈이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택배물을 분류해내는 일을 맡는 분류원들은 실적에 따라 수수료를 택배 회사로부터 받는다. 이렇게 분류된 택배물을 소비자에게 직접 운송하는 택배트럭 사업자들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수수료를 받는다.
이들 분류사업자와 트럭사업자들이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수수료는 많게는 1200만원에서 적게는 70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수수료에서 10%는 자신이 소속된 대리점에 내고, 10%는 세무 당국에 부가가치세로 낸다. 여기서 차량유지비 등을 뺀 게 순수익이다.
온라인 쇼핑이 폭발하면서 택배업은 유례 없는 호황을 누린다. 거기다 우리나라는 개인 택배사업자들이 어렵지 않게 일할 수 있는 구조다. 운송 반경이 넓어 유류비 등의 지출이 많은 미국 등에 비해 우리나라는 수도권뿐 아니라 지방도시들까지 인구밀도가 높아 가까운 지역으로 더 많은 택배물을 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 운전해야 하고 택배물 파손에 항상 신경 써야 하지만 돈 버는 재미는 있습니다.” 택배 트럭을 5년째 몰고 있는 B씨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1년에 한 달 정도는 휴가라 생각하고 아예 일 안 하고 가족과 망중한을 즐기는 여유도 갖는다”고 했다.
도래하는 ‘핸디맨’의 시대
30대 중반인 C씨는 서울에서 혼자 살던 경험을 살려 소규모 다세대주택 관리회사를 차렸다. 수년 전만 해도 아파트단지들이 중형급 이상의 전문기업에 경비와 보수 등 관리를 맡기는데 비해 대다수 다세대주택과 빌라는 관리가 전무했다. 1인 기업으로 출발한 C씨는 CCTV와 경보 시스템을 다세대주택에 설치해 치안 관리를 해주고, 수도 전기 등의 보수를 도맡았다. 서울 송파구 삼전동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서 출발한 이 회사는 이제 20여명 규모의 사원을 두고 있다. 사원 1명이 다세대주택이나 빌라의 관리와 보수를 다 맡아 책임지는 시스템이다.
“우리 같은 소규모 관리회사가 정말 많이 생겨났죠. 아마 수도권 웬만한 빌라는 관리회사들의 전문 관리를 받고 있을 겁니다.”
공업고를 졸업한 뒤 전문대를 마친 C씨가 1년에 버는 돈은 1억5000만원 정도라고 한다. “정해진 직장에서 맡겨진 일만 하면 되는 회사원보다 일하기가 편하진 않죠. 항상 거래처를 챙겨야 하고 시장 조사도 직접 해야 하니까요.” 그는 “이 분야에서 일해보니 앞으로 나 같은 핸디맨의 수요는 더 생겨날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다세대 주택뿐 아니라 관리가 취약한 소형·중형 빌딩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핸디맨(Handyman)’이란 단어는 주택의 전기와 하수도, 벽난로 등을 다 고쳐주는 손재주 좋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서구에서는 핸디맨이 대기업 샐러리맨보다 연봉이 많은 고소득 직종으로 도약한 지 오래다.
C씨는 바로 이 핸디맨이란 단어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핸디맨은 다양한 현장 경험과 습득한 기술, 거래 상대의 요구에 대응하는 능력 등을 갖추고 있다. 직업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미래사회는 이런 핸디맨을 원하는 경우가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삶의 형태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질수록 ‘새것’이 아닌 ‘헌것’을 고치고 유지하며 관리하는 전문가를 원하는 수요가 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고급 목공기술을 지닌 목수나 자동차 정비 장인(匠人) 등은 대표적인 핸디맨으로 여겨져 고소득 직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