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남혁상] 개도 안 짖고 행렬도 가지 않을 땐

입력 2019-06-05 04:02

‘개가 짖어도 행렬은 간다(the dogs bark, but the caravan goes on)’는 말은 오래전부터 중동, 터키, 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 널리 쓰이던 격언이다. 캐러밴은 여러 명의 상인이 집단을 이뤄 사막지대를 이동하는 행렬을 뜻한다. 이 오랜 격언은 이후 중앙아시아로, 다시 서구사회로 넘어가면서 보편적인 속담으로 자리 잡았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건넨 말 중에도 이 표현이 있다. 1939년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이 속담은 널리 알려졌다. 다만 ‘행렬’은 ‘마차’ ‘기차’ 등으로 조금씩 변형되기도 한다. 어려움, 비난에 굴하지 않는 의지를 강조하거나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묵묵하게 목표를 향해 정진하겠다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정치인들은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해 왔다. 2016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캠프가 경선에서 비공식적으로 써 왔던 슬로건도 ‘개가 짖어도 행렬은 간다’였다. 당내 다른 경선 후보가 아무리 자신을 향해 비판 수위를 높여도 저 갈 길을 가야 한다는 취지였다.

영국 정치인 윈스턴 처칠도 “개가 짖을 때마다 멈추고 돌을 던진다면 결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고 했다. ‘스트롱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빠질 수 없다. 지난해 1월 미국 재무부가 러시아와 관련이 있는 정치인·기업인 명단을 공개하자 푸틴은 “개가 짖어도 행렬은 간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것”이라며 여유를 보였다.

이 표현은 1990년대부터 북한이 자주 쓰는 수사가 돼 버렸다. 특히 고강도 제재에도 핵·미사일 개발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낼 때마다 이를 등장시켰다. 주로 미국을 겨냥해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고 강변할 때 사용했다. 1차 북핵 위기 때인 1993년 뉴욕 북·미 협상장에서 북측 협상대표 강석주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막는 로버트 갈루치에게 영어로 이 표현을 썼고, 2007년에는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 김계관이 회담장에서 이 말을 했다.

2012년엔 포스터로도 만들어졌다. 그해 4월 북한은 광명성 3호 발사 계획을 공언했고, 미국의 경고가 이어졌다. 그러자 북한은 ‘통일강성대국’ 문구가 적힌 기차가 질주하고 그 옆에 미국 국기를 걸친 검은 개가 짖는 형상의 포스터를 제작했다. 북·미 간 긴장이 한껏 고조됐던 2017년 9월 북한 외무상 리용호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개 짖는 소리로 우리를 놀라게 하려 했다면 개꿈” “개는 짖어도 행렬은 간다”고 비난했다. 북한은 ‘개’를 특히 부정적, 비판적 용도로 많이 사용한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강경보수세력이 ‘개’인 셈이다.

대북 강경파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최근 “개가 짖어도 행렬은 간다”고 했다.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트럼프 대통령과 불화를 빚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반박하는 차원에서 거론한 것이지만, 이른바 원수지간인 볼턴과 북한 관료들이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극과 극은 통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핵 없는 한반도를 목표로 열렸던 1차 북·미 정상회담이 이제 1주일 뒤면 개최 1년을 맞는다. 서로 말폭탄을 쏘아대던 북·미는 1차 회담을 거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2차 회담은 결렬됐고, 얼마 전 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 ‘작은 무기’ 도발은 있었지만 아직까지 큰 충돌은 없다.

북한은 지난 수십년간 개가 짖어도 행렬은 간다는 식으로 핵 개발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최근 1년간은 겉으로 보기엔 큰 진전은 없는 듯하다. 반대로 비핵화도 진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협상 재개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개는 짖지 않는데, 행렬도 가지 않는 형국이다. 북·미가 서로에게 ‘짖는 개’가 되지 않고 조심스러워하는 현 상황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 됐든 ‘비핵화 행렬’이 다시 움직이려면 무언가 특별한 동기(動機)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혁상 국제부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