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파행이 길어지고 있지만 국회의원의 법안 발의 건수는 예년에 비해 급증한 것으로 2일 집계됐다. 여야 의원들이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공천심사 지표 중 하나인 입법 수행 실적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실적 채우기’에 급급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국회 의안정보 시스템에는 숫자갈이나 자구 수정 등 ‘꼼수 입법’이나 한꺼번에 여러 개 법안을 발의하는 ‘무더기 입법’이 눈에 띄었다. 황주홍 민주평화당 의원은 지난해 12월에만 200건 넘는 법안을 발의했다. 227개 공공기관의 개별 법안을 일일이 개정해 여성에 대한 차별 여부를 심사하는 유리천장위원회 설치 규정을 집어넣는 식으로 무더기 입법을 했다. 이철규 자유한국당 의원도 지난달 1일 13건의 개정안을 한꺼번에 발의했다. 사회적기업육성법 개정안, 밀항단속법 개정안 등 법안명은 다양했지만 모두 각 법안에 담긴 벌금 한도를 높이는 같은 내용이었다. 이들 법안을 공동 발의한 11명의 명단도 모두 일치했다.
국회가 사실상 문을 닫고 있는데 국회의원들이 법안 발의에 총력을 다하는 이유는 내년 총선 공천 심사를 앞둔 영향이 크다. 각 당이 현역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평가할 때 입법 수행 실적을 주요 지표 중 하나로 삼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경우 각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 건수, 입법이 완료된 법안 건수, 당론으로 채택된 법안 건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점수를 매긴다.
특히 민주당 중진 의원들을 중심으로 ‘현역 중진 물갈이론’에 대비해 벼락치기로 법률안을 발의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커지고 있다. 원혜영 의원은 20대 국회 들어 총 51건을 대표 발의했는데 그중 16개 법안을 지난 4월 8일 국회 사무처에 제출했다. 이석현 의원도 지난달 3일에 나눠 13건을 발의했고, 이상민 의원도 지난 3년 동안 발의한 30건의 법안 중 12건을 올해 초 발의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3선 이상 중진의 경우 정량 평가를 하면 초·재선 의원보다는 의정활동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며 “수도권 중진 의원들이 평가 ‘하위 20%’에 들까봐 불안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의정활동이 미진한 현역 의원들에게 공천 심사 과정과 경선에서 모두 20% 감점을 주기로 했다.
공천 심사 과정에서 수많은 법안의 옥석을 가리려는 당 차원의 노력도 눈에 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법안을 총 몇 개 발의했느냐도 평가 요소 중 하나지만 개정안보다 제정안에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당론으로 채택된 법안에 차등을 두는 식으로 평가지표를 지난 19대 총선 공천 때보다 개선했다”고 말했다.
빈손 국회에서 실적용 입법만 늘다보니 법안 가결률은 현저히 낮았다. 국회 의안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2일 기준으로 총 1만8209건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고작 4158건(22.8%)이 처리됐다. 이는 19대 국회(34.62%), 18대 국회(34.55%), 17대 국회(39.09%)와 비교해도 낮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임기 후반부로 갈수록 명분 쌓기용 법안을 내거나 다른 의원이 냈던 법안을 재탕, 삼탕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며 “무더기 법안 발의와 임기 만료에 따른 법안 폐기라는 악순환을 깨기 위해선 의정활동 평가 기준을 발의 건수에서 입법 완료 건수로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