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정부, 천안문 사태 지우기… 본토 청년들 ‘그날’ 모른 채 성장

입력 2019-06-03 04:05
1989년 6월 베이징 천안문 사태 당시 흰옷을 입은 한 남성이 천안문광장에서 중국군 탱크 앞으로 가로막고 서 있다. 외신 사진기자가 촬영한 이 사진은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이 됐다. 이 남성은 이후 이른바 ‘탱크맨’으로도 불렸다(위쪽 사진). 천안문 사태 30주년을 앞둔 지난달 30일 취재진이 찾은 천안문 앞에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있다. 천안문광장은 겉으로 평온해 보였지만 가로등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와 공안들이 행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로 천안문 사태를 역사에서 서서히 지워가고 있다. 국민일보DB,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1989년 4월 15일 개혁파 지도자인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청렴하고 진보적인 지도자로 존경받던 그는 1986년 대규모 학생시위를 옹호했다가 이듬해 자기비판서까지 쓰고 총서기직에서 물러났다. 1980년대 중후반 중국은 개혁·개방 후유증으로 부정부패와 물가상승, 빈부격차 등 각종 폐혜가 극심했고, 정치개혁 요구도 분출됐다.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추모 물결과 함께 반정부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는 대학살로 막을 내린 6·4 천안문(天安門)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까지 가세한 시위대는 100만명까지 늘어났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최후의 진압작전은 6월 3일 밤 10시쯤 시작됐다. 계엄군에겐 “어떻게든 광장을 되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부 부대원들은 “천안문광장을 수복하지 못하면 스스로 죽겠다”며 혈서를 쓰기도 했다. 작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처음에는 허공을 향해 총을 쐈지만 어느 순간 총구가 군중을 향하고 있었다”며 “소음이 천지를 뒤흔들었고 우리는 이성을 잃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중국 정부는 당시 사망자가 총 241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사망자가 최소 1000명이고, 최대 4000명가량이 숨졌다는 주장도 나온다.

중국 현대사의 비극인 ‘천안문 사태’가 4일로 3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천안문 사건은 중국에서 ‘금기어’로 남았고, 중국 정부의 철저한 통제와 감시 탓에 젊은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달 30일 기자가 찾은 베이징 천안문광장은 겉으로 평온해 보였지만 곳곳에 설치된 CCTV와 조용히 순찰하는 공안들로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천안문 동쪽 보안검색대에 서자 공안이 여권과 비자를 보더니 별말 없이 들어가라고 했다. 평일 낮인데도 마오쩌둥 사진이 걸려 있는 천안문 앞에는 기념사진을 찍는 국내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피흘린 역사의 현장이란 느낌은 없었다. 다만 천안문 앞에 늘어선 가로등마다 밤송이처럼 CCTV가 달려 있어 행인들을 찍고 있었다. 지하도 건너편 천안문광장도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공안들이 취재진을 불러세워 신분증과 기자증을 제시하라고 했다. 이어 책임자가 오더니 “기자인데 왜 신고도 없이 여기에 왔느냐” “천안문 관할 분국에 신고하지 않고 오면 위법”이라며 한참 동안 겁주는 발언을 했다. 그래서 “여길 떠나면 되느냐”고 하자 곧바로 보내줬다. 외신기자는 천안문광장에 취재하러 오지 말라는 의미였다.

중국에선 최근 천안문광장뿐 아니라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각종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감시도 삼엄하게 이뤄지고 있다. ‘천안문’ ‘6·4’ 등 3200개 이상의 관련 키워드가 온라인에서 검열되고, 이른바 ‘탱크맨’ 이미지도 유통이 차단되고 있다. 최근엔 일부 VPN도 막혔다. 중국은 안면인식기술 등 각종 첨단기술과 가택연금, 구금 등 유무형의 수단을 총동원해 반체제 인사들를 통제하고 있다.

인권단체 ‘중국인권수호자들(CHRD)’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최근 인권운동가인 후자를 베이징 자택에서 300㎞ 정도 떨어진 허베이성의 친황다오로 보냈다. ‘천안문 어머니회’ 발기인으로 당시 군의 총탄에 아들을 잃은 딩즈린(82)씨는 고령에도 지난달 20일 베이징에서 1000㎞ 떨어진 장쑤성 고향으로 떠나야 했다. 천안문 시위에 참석했던 가오위 기자는 지난 1월 17일부터 3개월가량 가택연금됐다. 독립영화 제작자 덩촨빈은 6월 4일을 연상시키는 천안문 사태 추모 기념주 ‘바주류쓰(八酒六四)’ 술병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구금됐다.

천안문 사태 당시 시위를 이끌었던 주요 인사들은 해외에서 기약없는 삶을 살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당시 추방됐거나 또는 망명했던 400여명의 반체제 지식인, 학생, 관료들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그들은 중국 정부가 ‘천안문 학살’에 대해 사과하면 귀국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국은 그날의 기억을 지우면서 세계 경제강국으로 성장했고, 본토 젊은이들은 천안문 사건조차 모른 채 자라고 있다.

다큐멘터리 ‘하상(River Elegy)’ 작가인 쑤샤오캉(70)은 89년 추방당했다가 14년 만인 2003년 부모 장례를 위해 잠깐 중국 본토 입국을 허가받았다. 미 메릴랜드주에 사는 그는 “당시 권력과 돈,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중국의 사회 분위기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며 “나는 서방에도 중국에도 맞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베이징대 학생으로 천안문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왕단(50)은 7년간 수감됐다가 미국에서 20년간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은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키우며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이 처해 있다”고 털어놨다.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책사 출신인 옌자치(77)는 파리에서 5년을 보낸 뒤 미 컬럼비아대 초빙학자를 지내고 글을 기고하면서 생계를 이어왔다. 그는 “나는 3년, 5년, 7년 안에 천안문 사태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고 어떤 장기계획도 세우지 않았다”며 “나는 중국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분열책도 이들을 힘들게 한다. 중국 공산당은 반체제 단체 사이에 정보원을 심어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방식으로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2000년대 초 대만 스파이로 몰렸던 왕단은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중국 정부가 퍼뜨리는 악의적인 소문을 대응하기엔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2013년 베이징대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워싱턴에 거주하는 샤예량(58)은 “천안문 단체들의 분열과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중국의 끈질긴 탄압은 이 운동의 쇠퇴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