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 6만여개 좌석에서 응원봉 ‘아미밤’이 별처럼 빛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둠을 밝혀주는 별 하나였는데 그들은 은하수를 통째로 가져다주었다. ‘21세기 비틀스’라 불리는 방탄소년단(BTS). 그들이 한국 가수 최초로 팝의 본고장에서 새 역사를 썼다. BTS는 1일과 2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러브 유어셀프:스피크 유어 셀프’ 유럽 투어의 포문을 열고 공연장을 가득 메운 12만 팬들과 축제를 펼쳤다. 6년 전 데뷔 앨범을 내며 아무도 좋아해주지 않으면 어떡할까 걱정했던 일곱 소년은 이제 전 세계 팬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슈퍼스타가 됐다.
1923년 대영제국 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웸블리는 48년 런던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이 열린 역사적인 장소다. 축구팬에게는 ‘축구의 성지’로 통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곳은 많은 팝스타들의 기념비적인 공연이 열린 장소로 각인돼 있다. 그동안 웸블리에서는 비틀스, 마이클 잭슨, 오아시스, 에미넘, 에드 시런, 비욘세 등 쟁쟁한 뮤지션들이 콘서트를 열었었다. 밴드 오아시스 출신인 노엘 갤러거는 최근 한국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보이밴드가 웸블리에서 한국어로 노래를 부른다니 믿을 수 없다”며 놀라워했다. 정말 그랬다. BTS는 한국어 노래를 불렀고, 유럽 관객들은 한국어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하고 한국어로 된 구호를 외쳤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2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방탄소년단이 팝의 주류 시장에 안착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 공연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웸블리는 슈퍼스타들만이 설 수 있는 무대”라며 “영국인들은 이번 공연을 통해 BTS가 자국이 배출한 팝스타들과 어깨를 견줄 만한 위치에 올라섰다는 점을 느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BTS는 압도적인 퍼포먼스 속에도 흔들림 없는 라이브 무대로 실력을 입증했다. 영국식 악센트를 강조한 재치 있는 인사로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시작부터 강렬했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재현한 세트를 배경으로 신곡 ‘디오니소스’를 부르며 등장했다. 이어 ‘낫 투데이’ ‘아이돌’ ‘페이크 러브’ 등 히트곡을 열창했다. 일곱 명의 솔로와 유닛 무대까지 30여곡을 모두 라이브로 소화하며 다채로운 공연을 선사했다. 또 국내외 차트에서 신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는 새 앨범 ‘맵 오브 더 솔:페르소나’의 타이틀곡 ‘작은 것을 위한 시’와 수록곡 ‘소우주’ 등의 무대도 펼쳤다.
공연에 앞서 가진 글로벌 기자회견에서 방탄소년단은 “언젠가 꼭 서고 싶다고 다짐했던 이곳에서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다. 웸블리에서 전 세계 팬들과 함께 공연을 즐길 수 있어 가슴 벅차고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들은 공연 중간 중간 “우리가 드디어 웸블리에 왔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그곳” “아미(BTS 팬클럽)와 함께 만든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팬들도 공연 후반부 ‘힘들 땐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아봐’라는 문구가 새겨진 슬로건을 6만명이 동시에 드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콘서트장에선 외국 아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온 데보라와 앨리스, 마우로는 “BTS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는다. 대학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온 리사는 “BTS 지민과 정국의 고향이 궁금해 2년 전에 부산에도 다녀왔다”고 전했다.
앞서 BTS의 공연을 앞두고 영국 곳곳에선 콘서트를 보기 위해 모인 팬들로 진풍경이 펼쳐졌다. 공연 며칠 전부터 런던 시내에 위치한 월드투어 팝업 스토어에 긴 줄이 이어졌다. 평균 2시간은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었지만 팬들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첫 공연 전날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옥외광고판에 상영된 BTS의 영상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인 팬들은 이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추며 축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공연 당일에도 웸블리 스타디움 일대는 팬들이 이른 아침부터 모여 히트곡을 함께 부르고 응원 문구를 외치며 기대감을 높였다. 이날 공연은 네이버 V라이브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됐으며, 일본에서는 300여개 극장에서 시차를 두고 상영됐다.
BTS가 웸블리에서 성공적으로 콘서트를 열 수 있었던 건 이들의 인기가 영국에서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BTS는 지난 4월 발표한 음반 ‘맵 오브 더 솔:페르소나’로 영국 오피셜 앨범차트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정상을 차지했다.
BTS는 지난달부터 미국을 시작으로 스타디움 투어를 벌이고 있다(표 참조). 영국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들은 프랑스 파리,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웸블리(런던)=한승주 기자, 박지훈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