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석 나란히 선 전 대법원장·대법관… 사법 흑역사

입력 2019-05-29 18:46 수정 2019-05-29 23:45
양승태(왼쪽)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가운데)·고영한 전 대법관이 2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피고인석에 함께 선 것은 71년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권현구 기자, 뉴시스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법대가 아닌 피고인석에 나란히 섰다. 71년 사법부 역사상 처음이다. 사법부 정점에 섰다가 피고인 신세로 전락한 이들은 재판 시작부터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검찰과 날 선 공방을 벌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부장판사 박남천) 심리로 29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첫 재판이 시작됐다.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 지 125일 만이자 기소된 지 107일 만이다.

두 전 대법관은 재판 시작 20여분 전 재판이 진행되는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 들어섰다. 재판부가 입정한 뒤 유일하게 구속 상태인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 피고인 대기실에서 나오자 14명의 변호인과 고 전 대법관이 일어서서 양 전 대법원장을 맞았다. 박 전 대법관은 앉은 채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양 전 대법원장도 수의가 아닌 양복 차림으로 출석했다.

재판을 시작하며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재판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고 요청하자 양 전 대법원장과 두 전 대법관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업을 묻는 질문에는 셋 모두 “직업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재판부는 “조서에 무직으로 기록해두겠다”고 했다.

첫 공판기일에 발언 기회를 얻은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공소장과 수사의 문제점에 대해 20여분간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공소장에 대해 “용은커녕 뱀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격”이라고 꼬집으며 “법률가가 쓴 법률 문서라기보다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자문을 받아 한 편의 소설을 쓴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라고 비난했다. 특히 “법적 측면에서 허점과 결점이 너무 많다”며 “가장 필요한 법원 재판 절차나 법관의 자세, 이런 측면에 관해 (검찰이) 너무 아는 것이 없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법관도 “많은 법관들이 (검찰로부터) 훈계와 질책을 들은 듯한 조서의 행간을 보니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언급했다. 이어 “이 재판은 도의적·사회적·역사적 책임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형사법적 책임을 가리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고 전 대법관 또한 “행정처장으로서의 직무행위를 직권남용이라 묘사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강력히 반발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발언이 끝나자 검찰은 즉각 “반박할 기회를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이에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에게) 반박할 기회를 주면 저에게도 반박할 기회를 달라”고 맞섰다. 재판부는 양쪽 모두 별도의 의견진술 기회를 주지 않고 “박병대 피고인 변호인의 의견진술을 듣겠다”며 다음 절차로 넘어갔다.

검찰은 이에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재판장님 의견에 따르겠지만 공소사실에 대해 검사가 주장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조금 유감스럽다”며 휴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강제징용 소송 등 재판에 개입하고 법관을 부당하게 사찰해 불이익을 준 혐의 등 47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두 전 대법관은 양 전 대법원장과 재판 거래 등을 공모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