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밀알’은 원래 대흥제일교회 청년회 이름

입력 2019-05-31 00:05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가운데)가 1980년 밀알선교단 회원들과 함께 토요전도활동을 펼치는 모습. 세계밀알연합 제공

사람들은 밀알선교단이 총신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총신대의 한 동아리가 발전해 밀알선교단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밀알의 역사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지도자들과 아직까지 밀알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나의 책임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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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은 총신대에서 생기지 않았다. 설립자인 내가 총신대 학생이었을 뿐이다. 밀알 창립 준비를 구체화했던 시절 내가 살고 있던 곳이 총신대 기숙사였고 창립 과정에 몇몇 총신대 학생들이 참여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밀알 창립 과정에서 많은 기여를 한 대흥제일교회 청년들이 간과돼선 안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흥제일교회 청년회가 밀알을 세우는 과정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밀알’이라는 이름 자체가 대흥제일교회 청년회의 이름이었다.

내가 서울 신촌에 있는 대흥제일교회 청년회에 처음 나간 것은 1979년 3월 17일 토요일 저녁, 유장열 전도사를 따라서였다. 특이한 것은 당시 주일예배 장년 출석 교인이 150명도 채 안 됐는데 토요일에 모이는 청년들은 80명이 넘었다. 청년회 활동이 활발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교회에 다니면서도 토요일에는 대흥제일교회 청년회 모임에 나오는 청년들이 많아서였다.

대학촌이어서 그런지 청년들은 주로 대학생들이었지만 30세 이하의 직장인들도 많았다. 처음 갔던 날 노련하게 사회를 보며 찬양 인도를 하던 형제 하나가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가 바로 1995년 출범한 세계밀알연합회 운영위원회 초대 총무를 역임하고 현재 세계밀알연합회 법인이사로 있는 유원식 장로다. 그는 당시 대학 4학년으로 회장을 맡고 있었다.

청년회 모임은 찬양을 하다가 담임전도사가 간단히 메시지를 전하고 이어 다섯 그룹으로 나눠 각각 다른 주제를 갖고 리더의 인도에 따라 성경공부를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중간에는 매주 새로운 사람이 생활 속에서 은혜받은 내용들을 간증하는 순서도 있었다. 2개월마다 그룹이 바뀌었는데 그때는 본인이 관심 있는 주제에 따라 그룹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했다. 청년회가 운영되는 방식을 주의 깊게 관찰해 밀알을 만든 후 많이 응용했다.

1980년 3월 1일 ‘밀알보’ 창간호에 게재된 이재서(당시 밀알선교단장) 총재의 발행사. 세계밀알연합 제공

청년회를 이끄는 사람은 당시 서울신학대 4학년이었던 김영훈 전도사였다. 나와 비슷한 연배였는데 내가 처음 간 날 그는 내게 다음 주부터 한 그룹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뜻밖이었다. 아무리 내가 신학생이어도 앞도 보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그것도 처음 나간 날, 다섯 명밖에 안 되는 그룹 리더로 세운다는 건 보통 파격이 아니었다.

솔직히 리더를 정말 맡아보고 싶었다. 특히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잘할 자신도 있었다. 난 총신대에 들어오기 전 성경학교에서 2년 동안 고등학교 수업을 하듯 성경을 공부했다. 그것도 건성으로 한 것이 아니라 40여명의 동기들 중 언제나 최고 점수를 획득할 만큼 열심히 했다.

설교 경험과 성경을 가르쳐 본 경험도 이미 많았다. 순천성경학교를 다니던 2년(1975~1976) 동안 고향 교회 주일 낮과 밤 예배 설교의 절반은 내가 했다. 담임 전도사님이 그때 장신대에서 신대원 과정을 공부하며 격주로 내려왔기 때문에 못올 때의 주일 강단을 성경학교 학생인 내게 맡겼다.

그러나 그 뜻밖의 제안을 받은 날 기분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맨 나중 순서로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그룹 리더들이 소개되고 각자 원하는 그룹으로 지원하라는 광고가 있었다. 짧은 순간 마음이 많이 설렜다.

‘누가 내 그룹으로 올까. 80을 5로 나누면 16. 그들은 누굴까.’ 그런데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내 그룹에는 여학생 세 명만 지원했다. 그것도 둘은 그날 처음 나온 사람이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무시당한 느낌도 들었다. 반을 나누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절히 인원을 조정해 배치해줄 일이지 인기투표처럼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날 밤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마치 싸움에서 지고 온 사람처럼 계속 마음이 찜찜했다. 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날 그 교회에 가던 도중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대흥제일교회는 버스에서 내려 몇 번 코너를 돌아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서야 있었다.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르렀을 때 함께 가던 유장열 전도사가 내게 말했다. “저기 앞을 못 보는 분이 모자를 앞에 놓고 기타를 치고 있네.”

이재서 박사

그 순간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그러나 나는 “아, 그래?” 정도의 반응만 보였고 둘 다 그냥 지나쳐 교회로 들어갔다. 그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즈음 오갈 데 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안타까운 장애인들의 문제로 많이 고민하고 있었다. 일부 구걸하는 시각장애인 중에는 내가 직접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서 지면 안 된다. 자존심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그 교회 청년들 모두가 구걸하던 그 시각장애인을 보고 교회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바로 그 장애인의 문제를 말해줘야 한다.”

나는 무조건 열심히 그 일을 감당해 보기로 다시 마음먹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