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에서-태원준] 고령화 조폭

입력 2019-06-01 04:01

2011년 8월 일본 후쿠오카현 구루메시의 한 주택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도진카이라는 야쿠자 조직의 두목이 사는 곳이었다. 기관총 한 자루, 권총 두 자루, 수류탄 두 개를 들고 이 집을 습격한 사람은 경쟁 조직 규슈세이도카이의 조직원 겐노. 홀로 정원에 서서 집안으로 수류탄을 잇따라 던진 뒤 뛰쳐나오는 두목의 경호원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가 소지한 가공할 화력의 무기보다 일본인을 더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나이였는데, 1933년생이니까 무려 78세였다. 할아버지 야쿠자의 수류탄 습격은 폭력조직도 피해가지 못한 일본의 고령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됐다.

일본 경찰이 2015년 파악한 전국의 야쿠자 조직원은 모두 2만명이었다. 그중 50대 이상이 41%를 차지해 사상 처음으로 40%를 넘어섰다. 최대 조직인 야마구치구미는 각 지역 조장 가운데 3분의 2가 환갑을 넘겼고 최고령자는 80세였다. 조장급이 은퇴하면 수천만엔씩 일종의 퇴직금을 지급하는 관행이 있는데, 고령자가 많아지면서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하부조직의 상납금을 대폭 인상했다고 한다. 늙은 야쿠자를 부양하느라 젊은 야쿠자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모습이 고령화 시대의 국민연금 세대갈등과 다르지 않다. ‘영감탱이 야쿠자’란 만화가 등장하고 ‘8인의 수상한 신사들’처럼 70대의 노쇠한 야쿠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영화가 속속 만들어질 만큼 일본 야쿠자는 고령화 물결에 제대로 휩쓸렸다.

한국의 조폭 영화는 ‘악인전’의 마동석을 비롯해 아직 젊고 건장한 이들이 전면에 서 있지만 현실의 조폭 세계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지난주 경기도 양주의 주차장에서 50대 부동산업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얼굴 등 온몸에 피멍이 들고 다리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를 납치해 구타하고 살해한 것은 폭력조직 국제PJ파의 부두목 일당 4명인데, 그중 3명이 60대였다. 피해자에게 받을 돈이 있어 납치했다는 부두목이 60세, 피해자를 폭행하고 살해했다는 그의 부하 2명이 61세와 65세, 납치를 거들었다는 부두목의 동생이 58세.

국제PJ파는 1980년대 광주에서 결성됐다. 국제당구장과 PJ음악감상실을 근거지로 삼은 까닭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드라마 ‘모래시계’에 등장하는 조폭의 실제 모델이 이 조직이었다고 한다. 서른을 갓 넘긴 1990년 국제PJ파에 가입했다는 부두목은 30년 동안 조폭 생활을 해 왔다. 환갑이 돼서도 정년 없는 이 직업(?)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이미 환갑을 넘긴 부하들을 동원해 강력범죄를 저질렀다. 육십 줄에 들어선 이들이 사람을 때려죽이는 완력을 가졌다는 게 놀랍고, 그 나이에도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한다는 게 또 놀랍다.

2002년 경찰관 박건찬씨는 한·일 조직범죄의 실태를 분석한 논문에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일본 야쿠자와 달리 한국 조폭은 젊은 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더욱 강력한 단속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후 우리나라 인구구조는 일본을 추월하겠다 싶을 만큼 빠르게 고령화됐고, 조폭의 세계에도 그 물결이 휘몰아쳤다.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지난해 공개한 경찰청의 ‘동네조폭’ 현황 자료는 이런 추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정 지역에서 주민들을 공갈·협박·폭행하며 기생하는 이들이 2년간 1만9000여명 검거됐는데, 48%가 50대 이상 장년층이었다. 60대 이상만 따져도 12%를 넘었으니 일본 야쿠자의 고령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가다간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령 조폭이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지 않을까, 할아버지 야쿠자의 수류탄 습격처럼 국제PJ파 60대 조폭들의 납치살인극은 조폭 고령화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지 않을까 싶다.

태원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