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잘 안 따라가고 바로바로 생각이 안 나더라고. 다 아는 건데 너무 빨라서….”
지난 23일 서울 강남운전면허시험장을 찾은 최모(75)씨는 고령운전자를 위한 ‘인지능력 자가진단’을 마친 뒤 멋쩍게 웃었다. 최씨는 운전에 필요한 기본 능력을 평가하는 이 검사에서 최하위인 5등급을 받았다. 점수가 낮아도 면허를 갱신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최씨는 못내 아쉬운 듯했다. 그는 “나이 들면 시골로 내려가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응급상황이 생길 때 면허가 꼭 필요하다”며 “차라리 도로주행 시험을 본다면 자신 있다”고 말했다.
올해부터 최씨와 같은 75세 이상 노인은 3년마다 고령운전자 교육을 반드시 수강해야 면허를 갱신할 수 있다. 고령운전자 교육은 도로교통법 강의와 함께 단기기억, 공간 주의력, 집중력 등을 평가하는 인지능력 검사로 구성된다. 표지판을 외우거나 방향이 다른 그림을 찾는 식이다. 규칙은 간단하지만 제한시간이 짧아 젊은이도 1등급을 맞기가 쉽지 않다. 터치스크린을 사용하다 보니 컴퓨터가 익숙지 않은 고령자들은 올바른 위치를 ‘터치’하는 것부터 난관이다.
이날 교육에는 75세부터 84세까지 34명이 참여했다. 검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작동이 잘 안 된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이들도 많았지만 휙휙 바뀌는 화면을 눈으로 좇아가기 버거워 보이는 수강생도 있었다. 결국 34명 중 6명은 중간에 시험을 중단하고 별도의 장소에서 추가 검사를 받았다. 간이 치매검사 등에 통과하지 못하면 수시적성검사 대상자로 분류돼 병원 진단서를 제출해야 한다.
비교적 빨리 인지능력 검사를 마친 조모(76)씨는 “평소에 컴퓨터를 사용해서 조작이 어렵지는 않았다”며 “실제 운전상황에 필요한 부분들을 테스트할 수 있어서 굉장히 유익했다”고 했다. 아내와 여행을 다니며 노년을 보내기로 약속했다는 조씨는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시력이 떨어지니까 표지판 숫자나 글씨도 더 크게 해주고, 차선도 밤에 잘 보이게 야광 처리를 하는 등 고령자를 배려한 교통시설이 갖춰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육을 담당한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처음에는 ‘나이 들어도 운전에 문제가 없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시던 분들도 막상 교육을 마치고 나면 자신의 몸의 반응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낀다”며 “합격이나 불합격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운전능력을 스스로 인지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검사를 마친 뒤 수강생들은 “나이가 들면 운전능력도 바뀐다”는 강사의 말에 수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고령운전자 교통사고는 2010년 1만2623건에서 2014년 2만275건, 2018년 3만12건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지난 12일에도 경남 통도사에서 75세 운전자가 몰던 차량이 갑자기 돌진해 1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다쳤다. 경찰은 운전자가 브레이크 대신 가속페달을 밟아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비슷한 사고가 반복되다 보니 고령자의 운전에 대한 경각심도 커지는 분위기다. 전국 시·도에선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하는 고령자에게 인센티브를 지원하는 사업이 빠르게 확산됐다. 부산에 이어 서울시도 지난 3월부터 70세 이상 운전자가 면허를 반납할 경우 10만원이 충전된 교통카드를 지급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3월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한 65세 이상 운전자는 7346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5.6배 수준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무조건 고령자 운전을 막는 게 해결책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고령자 역시 이동권을 보장받아야 하고, 생업을 위해 운전대를 놓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최재성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고령이더라도 운전자 개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운전능력이 매우 다르다”며 “일정 연령 이상이면 면허를 박탈하는 방향보다는 매년 받는 건강검진 결과를 면허 제도와 연계하고, 주행능력을 테스트하는 등 운전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운전능력 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운행 시간 및 지역에 제한을 두는 ‘제한운전면허’ 시스템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 연구원은 또 “차로 이탈을 막거나 서행 상태에서 위험을 감지해 멈추는 기능은 이미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며 “비용 문제가 있겠지만 고령운전자 차량에 이런 기술을 추가한다면 사고 발생은 확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고령운전자가 면허를 갱신할 때 도로주행시험을 요구하는 건 물론 의료진과 담당 공무원이 고령운전자의 신체적·인지적 장애를 판단할 수 있는 의료지침서를 만들었다. 2014년에는 교차로, 고속도로 입출구 등에서 고령운전자 사고를 감소시킬 수 있는 도로 디자인 지침을 내놨다.
프랑스 역시 모든 지역에서 공통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고령운전자 맞춤 의료지침서를 마련했다. 고령자 교통안전 교육을 자치주나 전문 교육기관에 위탁한 영국에선 교육관과 함께 주행운전을 하며 운전 습관을 개선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교육이 이뤄진다.
고령사회로 진입한 한국은 올해 안으로 ‘고령자 교통안전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면허갱신 시 체험형 교육으로 면허 자진 반납을 유도하고 수시적성검사 통보 대상을 확대하는 등의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김규동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령자 중에선 큰길까지 나가는 게 어려운 사람도 있고, 앱으로 택시를 부르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며 “면허갱신 시스템을 강화하는 한편 표지판을 더 눈에 띄게 바꾸고, 대중교통 서비스를 고령자 수요에 맞게 바꾸는 등 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함께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령자의 이동권 보장은 재정 지원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무작정 주장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면서도 “규제나 단속보다 중요한 건 사회공동체 안에서 고령자와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