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킨 선교사가 뿌린 신앙의 씨앗, 군산 3·5만세운동으로 피다

입력 2019-05-30 00:04
전킨 선교사가 1903년 2월 군산 구암동에 설립한 영명학교(왼쪽)와 영명학교 건물을 재현해 건축된 3 1운동 100주년 기념관 모습. 군산=강민석 선임기자

100년 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의 외침은 나흘 뒤 전북 군산 구암동의 작은 동산에서 다시 터져 나왔다. 한강 이남에서 벌어진 첫 만세 시위로 역사에 기록된 ‘3 5 만세운동’이다. 지난 23일 찾은 군산 구암동 334-3번지엔 완만한 오르막길 200m에 걸쳐 만세운동의 중심축이었던 구암교회(김영만 목사)와 만세운동 모습을 그린 벽화, 기념비 등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동산 꼭대기에 다다르자 근대건축 양식의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군산 3·5만세운동의 역사적 기록을 한데 모아 둔 ‘3 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다. 만세운동을 이끈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 건물을 재현해 지난해 6월 개관했다. 기념관을 안내한 김영만 목사는 “군산 3 5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이곳에 복음의 씨를 뿌린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킨 선교사

1892년 11월 미국 남장로회 ‘7인의 선교사’ 일원으로 조선 땅에 도착한 전킨(WM Junckin·한국명 전위렴) 선교사는 1895년 3월 드루(AD Drew·유대모) 의료선교사와 함께 군산 수덕산 기슭에 초가 두 채를 매입해 의료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군산이 개항한 1899년 12월 구암동산에 선교기지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구암교회 예수병원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를 차례로 세웠다.

전 선교사는 구암교회의 1대 담임목사로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펼치던 중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고 1908년 1월 2일 숨을 거뒀다. 김 목사는 “전킨 선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직전 ‘저를 궁멀(구암동)에 묻어주세요. 저는 궁멀 전씨 전위렴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을 만큼 군산에 대한 애정이 컸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전킨 선교사가 군산 지역 성도들에게 심어줬던 신앙과 민족정신은 무산될 위기에 처했던 만세운동의 불씨를 살려낸 원동력이었다. 1919년 당시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세브란스 의전 학생이었던 김병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갑성(남대문교회) 집사로부터 군산지역 연락 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는 2월 26일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이모부 박연세(구암교회) 장로를 만나 서울의 상황을 전하고 숨겨 가져온 독립선언서 90여장을 건넸다. 박 장로는 구암교회 성도였던 동료 교사 이두열 이준영에게 상황을 전하고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학교 숙직실과 기숙사 다락방에서 독립선언서 3500여장을 등사해 구암교회 성도,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학생, 예수병원 직원 등에게 전달했다. 거사 일은 장날인 3월 6일로 정했다.

김영만 군산 구암교회 목사가 지난 23일 3 1운동 100주년 기념관에서 군산 3·5만세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군산=강민석 선임기자

하지만 하루 전인 5일 위기가 찾아왔다. 시위 움직임을 눈치챈 일경이 학교를 급습해 박연세 이두열을 강제 연행해갔다. 하지만 민족의 자유를 향한 집념은 민중을 더 강하게 결집시켰다. 구암교회 출신 교사와 학생들은 긴급 회동을 갖고 “오늘 만세운동을 펼치자”고 결단했다. 군산 월명공원에 세워진 삼일운동기념비 안내문은 3 5만세운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그리고 예수병원 직원들이 주동해 벌인 시위에는 군산 보통학교 수백 명이 합세, 애국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500명으로 늘어 독립만세 소리는 시 전역에 메아리쳤으며 30일 밤에는 시민 1000여명이 횃불 시위를 벌여 일본 관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예상치 못한 대규모 시위에 당황한 일경은 익산 지역 헌병대까지 동원해 무차별 총격을 벌이며 탄압에 나섰지만, 시위대는 굴하지 않았다. 5월까지 28차례 이어진 3 5만세운동에는 3만1500여명이 참여했다. 사망 53명, 부상 72명, 투옥 195명 등의 희생자를 낳았지만 호남과 충청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는 도화선이 됐다.

당시 영명학교 교장이었던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인돈) 선교사는 5월 4일 미국으로 귀국해 조선의 상황과 3 1운동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렸다. 그는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서 ‘일제를 향한 조선인의 비폭력 항거’를 주제로 자유의 회복을 호소했다. 미국 교포신문에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된 영명학교 학생과 교사 12인의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군산제일고 교사 심영재(군산성결교회) 집사는 이날 영명학교 졸업생 명부를 보여줬다. 여기에는 1919년과 1920년이 비어있었다. 심 집사는 “당시 중학교 졸업시험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독립 후에 졸업하자’고 외치며 일제의 총칼에 맞서 맹렬히 거리로 나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학교는 매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전킨 선교사의 영명학교 설립정신, 3 5만세운동과 선배들의 항거,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됐던 역사 등을 소개한다”며 “강의를 마친 뒤 더 자세한 역사를 들려달라는 학생도 많다”고 했다.

군산시민들은 1992년부터 매년 3·1절에 구암교회를 중심으로 ‘군산 3 5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하고 있다. 군산시는 3·5만세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6년 9월 구암동산을 ‘3·1운동 역사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 왼편 옛 구암교회 건물은 3·1운동 역사영상관으로 꾸며 군산지역 항일운동과 3·5만세운동 영화를 상영한다.

군산=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