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의 만찬 회동은 여러 억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서 국정원장은 국가 정보를 다루는 총 책임자이고, 양 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실세다. 더욱이 양 원장은 여야가 사활을 건 내년 총선의 여당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민주연구원의 장이다.
두 사람은 지난 21일 서울 강남의 한정식집에서 4시간가량 만찬을 가졌다.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독대가 아니었고, 두 사람과 평소 알고 지내던 몇 사람이 동석했다고 한다. 양 원장은 “특별히 민감한 이야기가 오간 자리가 아니었고 그런 대화도 없었다”고 했다. 함께 자리했던 중견 언론인도 “민감한 정치적 얘기는 없었다. 이 만남이 엉뚱한 의혹과 추측을 낳고 있어 참석자 중 한 사람으로서 매우 당혹스럽다”고 해명했다.
국정원장이라고 해서 사인과 모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오로지 그림자 행보만 하라는 것은 가혹하다. 하지만 국정원장이 만나도 되는 사람이 있고, 만나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양 원장이 다른 직책에 있었다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렇게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터다. 선거 때마다 권력의 편에서 개입했던 정보기관의 흑역사를 생각하면 뒷말이 안 나올 수 없다. 야당이 “정권이 앉힌 국정원장과 여당 실세가 밀회한 것이다. 대놓고 국정원장이 선거에 개입하겠다는 것”(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이라고 격하게 반응할 만하다. 오죽하면 여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까.
양 원장은 앞서 지난 16일 문희상 국회의장을 예방했다. 국회의원 경력이 전무한 원외 인사가 문 의장을 만났다는 건 현 여권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을 실감케 한다. 그도 이런 시선이 부담돼 문재인정부 출범과 동시에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외유에 나선 것 아니었나. 양 원장은 ‘적절한 만남이라고 보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것은 각자 판단하라”고 답했다. 그도 만남의 파장이 심상치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권 실세의 일거수일투족은 주목의 대상이다. 직의 범위를 넘거나 걸맞지 않은 언행은 국정 운영에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양 원장이 벌써 백의종군의 초심을 잊은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사설] “민감한 대화 없었다”는 양정철 해명 누가 믿겠나
입력 2019-05-29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