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신창호] 퇴장하는 세계의 중도정치

입력 2019-05-29 04:03

1995년 4월 영국 노동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당기의 색깔을 적홍색에서 분홍색으로 바꿨다. 1900년 창당 이래 정통 좌파정당을 고수하던 노동당의 좌파그룹은 지도부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중산층 출신 변호사 토니 블레어 당수는 이들 앞에서 “수십년 동안 집권조차 못하던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 외쳤다. BBC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당대회에서 블레어의 안이 통과되는 순간 당원들은 모두 함께 눈물을 뚝뚝 흘렸다. 노동당은 분배 정의만을 추구하지 않고, 경쟁적 시장주의도 받아들이는 ‘제3의 길’을 본격화했다. 노동당은 1997년부터 2010년까지 13년을 집권하며 두 명의 총리,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을 배출했다.

이때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유럽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중도 정치’가 지배한 사회였다. 극우와 극좌는 비빌 언덕조차 없었다. 자국우선주의를 내세운 극우정당은 영국 프랑스에서 1~5% 지지율에 급급했고, 독일에서 발흥한 급진적 녹색당도 한 자릿수 지지율에 그쳤다. 중도 좌파와 우파는 거의 수렴하듯 비슷한 정책으로 번갈아 집권했다. 유럽 주요국가 연합체인 유럽연합(EU)의 사정도 같았다.

그러던 유럽의 정치 지형은 26일(현지시간) 완전히 바뀌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극우정당들이 약진하고 중도 진보·보수 정당들이 몰락한 것이다. 이름도 생소한 영국의 브렉시트당, 마린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 국민연합(RN)이 유럽의회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훨씬 더 왼쪽’인 유럽 녹색당 그룹도 약진해, 독일에선 20%의 지지율을 넘겼고 프랑스에선 13.2%의 지지율을 얻었다. 정반대로 유럽의 중도 정당은 거듭 무너지는 형국이다. 프랑스의 중도진보 사회당과 중도우파 대중운동연합(UNP)은 2년 전부터 존재감이 사라졌다. 사회당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UNP는 정당 자체가 사라질 판이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선 이래 2016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까지 민주당과 공화당이 크게 다르지 않은 중도정치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이래 두 정당의 주류는 점점 더 ‘강경 매파’와 ‘강경 비둘기파’가 돼 가는 상황이다.

2020년을 눈앞에 둔 21세기의 세계정치 지형이 100년 전인 1910년대 말을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고 하면 과장된 언사일 것이다. 그때도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는 다 몰락했다. 국가 간 경제적 이익이 정면충돌했던 당시엔 자국우선주의를 앞세운 강경우파가 ‘제1의 길’로 받아들여졌다. 극우에 맞섰던 좌파 역시 극좌가 될 수밖에 없었고, 소외되던 근로계층에겐 이들만이 ‘제2의 길’이었던 셈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동서냉전을 겪은 뒤 인류가 택한 생존의 방식은 타협과 공존·공생이었다. 중도정치는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세계정치의 주류였단 뜻이다.

그런데 요즘 중도정치는 ‘허황된 꿈’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유럽에선 “이민자한테 내 일자리를 빼앗기고 몰래 숨어든 외국인에게 테러를 당하는 데 무조건 포용만 해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더 높다. 미국에선 “우리만 공정하지 못한 무역의 희생자가 될 수 없다”는 다수의 항의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쉽게 듣던 ‘세계는 하나’라는 뜻의 ‘글로벌 월드(global world)’란 단어는 이제 뉴스에서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왜 세계 각국의 시민들은 이토록 쉽게 중도정치세력에게 등을 돌리는 것일까. 아마도 그동안 집권해온 중도 좌·우파가 새롭게 등장하는 경제적·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권력과 기득권에 취해 고통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아서 일지 모른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란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정의로워 ‘보이는’ 정치세력이라도 그 자리에 안주하는 순간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 아닐까 싶다.

신창호 토요판 팀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