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가업상속공제… “요건 완화 필요” vs “부자 감세 반대”

입력 2019-05-28 04:02

지난해 연매출 2700억여원을 기록한 A사는 잘 알려진 중견 식료품 기업이다. 3대째 경영을 이어오고 있는 가족기업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에서 인공지능(AI) 분야를 전공한 4대가 가업에 뛰어들었다. 사실상 경영 승계작업에 들어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 멀다. 가장 큰 걸림돌은 현행 상속·증여세 제도다. 승계 과정에서 최대 세율이 50%인 상속·증여세를 내야 한다. 현금이 없다 보니 물려받은 주식을 팔아 세금을 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주식을 팔면 경영권 방어가 어려워진다. 3대인 B대표는 사모펀드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로 경영권 방어에 고생한 경험이 있다. 매출액 3000억원 미만 기업에 적용하는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활용할 수는 있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200억~500억원까지 공제받을 수 있지만, 상속 후 10년간 자산의 80%를 보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주식을 못 파니 나머지 세금을 낼 방법이 없는 셈이다. B대표는 지난 2월 한국중견기업연합회를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를 만나 이런 문제점을 토로했다.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인 중견기업 C사도 가업상속공제 제도에 불만이 있다. 자동차 내연기관 부품을 만드는 이 회사는 전기차 등장으로 풍전등화 신세다. 매출이 뚝뚝 떨어지는데 가업을 상속해야 하다보니 세금 부담이 만만찮다. 가업상속공제를 받으려고 해도 주력산업을 10년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 사양산업을 붙들고 있어야 세금을 깎아준다는 기준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기업의 가업상속공제 제도 개편 논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경제단체들은 제도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부의 대물림’을 우려하는 이들은 상속·증여의 실효세율이 10%대라며 부자 감세는 안 된다고 반박한다. ‘산업의 허리’인 중견기업을 탄탄히 만들면서 여론도 포용하는 ‘묘수’가 필요한 대목이다.

가업상속공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계기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이다. 홍 부총리는 지난달 12일 미국 워싱턴에서 기자 간담회를 가지면서 “현행 10년인 가업상속공제 사후관리 기간을 7년으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중견기업의 가업승계가 쉬워져야 장수기업이 더 많아질 수 있다는 인식이 반영됐다.


그러나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A사, C사를 포함한 중견기업들은 ‘업종 변경 자율화’ ‘지분 유지 기간 완화’ 등 요건을 더 낮춰야 실효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중견기업연합회 관계자는 “많은 중견기업들이 비슷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완화보다는 아예 공제혜택을 줄여야 한다는 정반대 시각도 있다. 실효세율을 고려하면 요건 완화가 필요없다는 것이다. 재벌닷컴이 2008~2017년 국세청 통계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평균 상속세율은 각종 공제 혜택 덕분에 17.3%에 불과하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지난 20여년간 가업상속공제 제도의 성과가 있었는지 실증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비판했다.

눈높이 차이는 명확하지만, 중견기업이 일본이나 독일처럼 100년 이상 이어지는 강소기업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 ‘질 좋은 일자리’에 목마른 상황에서 탄탄한 중견기업은 ‘생명수’다. 27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7년 결산 기준으로 한국의 중견기업은 4468곳에 이른다. 이들이 올린 매출액은 738조원으로 전체 영리법인 매출의 15.5%를 차지했다. 질 좋은 고용을 늘리려는 정부 입장에선 중소기업보다 여건이 나은 중견기업의 성장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업상속공제를 완화하자는 얘기가 나오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재부 관계자는 “사후관리 외에 다른 부분까지 포함해 심도 깊게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