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주도적으로 추진한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노·사·정 합의가 불발되자 총대를 메는 모양새다. 한국이 비준하지 않은 4개 핵심협약 가운데 3개의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비준을 위해 필요한 관련 국내법 개정안도 함께 발의한다. 국회에서 비준과 법 개정이 동시에 이뤄지도록 해 ‘비준이 먼저냐 법 개정이 먼저냐’는 논쟁을 피하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핵심협약 비준을 놓고 노사 견해 차이가 워낙 크다. 정부가 노사 모두 만족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정치권 논의 과정도 치열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정부 입장’을 발표하며 “미비준 4개 핵심협약 중 3개 협약의 비준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시점은 정기국회가 열리는 오는 9월로 잡았다. 한국은 1991년 12월 ILO 회원국이 됐지만, 8개의 핵심협약 중 ‘결사의 자유(제87호·제98호)’ ‘강제노동(제29호·제105호)’ 관련 협약 4개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EU)은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규정된 핵심협약 비준 노력이 부족하다며 분쟁해결절차를 개시해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협약을 비준하려면 상충하는 국내법을 손봐야 한다. 이 장관은 “협약 비준에 요구되는 법 개정 및 제도 개선도 함께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비준을 먼저 한 다음에 국내법을 개정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한국 헌법 체계상 선(先)비준은 사실상 어렵다. 법 개정안과 비준 동의안이 국회에서 같이 논의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선을 그었다.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국내법 개정 논의는 이미 경사노위에서 있었다. 결사의 자유 협약과 관련해서는 해고자·실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공무원의 노조 가입범위를 확대하는 공익위원안이 나왔었다. 이 장관은 “공익위원안을 포함해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합리적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모든 형태의 강제근로를 금지하는 협약 제29호의 경우 보충역 제도와 충돌한다. 의무병역법에 따른 군사적 성격의 작업은 예외로 인정받는데, 사회복무요원은 비군사적 업무 영역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이 장관은 “현역병 복무와 대체복무 선택권을 주는 방식으로 협약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제노동 제105호의 비준은 검토가 더 필요하다. 이 협약은 정치적 견해 표명 등에 따른 처벌로서의 강제노동을 금지한다. 예컨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아 노역하면 이 협약에 어긋날 가능성이 있다. 노역을 부과하지 않는 금고형이 있지만, 현재 한국은 과실범에만 금고형을 부과한다. 이 장관은 “형벌체계 개편과 맞물려 지금 상황에서 비준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편 경영계의 거센 반발은 걸림돌이다. 경영계는 단결권 확대에 상응하는 ‘생산활동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맞선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단결권만 확대하면 부작용과 우려가 크다. 한국의 특수성에 입각해 사안을 다뤄야 한다”는 입장문을 내놨다. 경영계는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등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반면 노동계는 ILO 핵심협약이 기본권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조건 없이 비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회 논의 역시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자유한국당은 “ILO 협약 비준이 가져올 영향을 놓고 충분한 사회적 합의도 없이 국제사회 압박을 핑계로 무리한 비준 절차를 진행하려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세종=정현수 기자, 지호일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