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정자로 인공 수정해 태어난 아이에 대해 아버지가 친자관계를 부정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대법원은 “부부가 동거를 하지 않아 남편의 자녀를 임신할 수 없는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는 때”에 대해서만 친자관계를 부인할 수 있다는 판례를 유지해오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2일 A씨가 두 자녀를 상대로 “친자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달라”며 낸 소송의 상고심 공개변론을 열었다.
A씨 무정자증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던 A씨 부부는 1993년 타인의 정자로 인공 수정해 첫 아이를 가졌고 친자로 출생신고했다. 이후 97년 아내는 혼외관계로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이를 몰랐던 A씨는 자신의 무정자증이 나았다고 착각하고 둘째 아이도 친자로 출생신고했다. 하지만 2013년 가정불화로 협의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둘째 아이가 혼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A씨는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모두 각하 결정을 내렸다. 법원은 “인공 수정에 동의한 이상 소송 제기가 부적법하다”며 심리하지 않고 종결했다. 둘째 자녀에 대해서도 “입양의 실질적 요건을 갖춰 양친자 관계가 성립한다”며 각하했다.
현행 민법 844조는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고 규정한다. 대법원은 83년 7월 ‘비동거’ 등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친자 부인을 인정해왔다.
이날 원고(A씨) 측 대리인인 김혜겸 변호사는 “친생자 추정 조항은 58년 민법이 제정될 때 만들어진 규정이다”며 “이제는 과학기술로 친자관계 여부를 명확히 판별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A씨와 자녀 간에 혈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게 과학적으로 명백하고 혼인관계도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친자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녀복리와 가정평화에 맞는지 의문이 든다”고 주장했다. 피고(자녀) 측 대리인인 최유진 변호사는 “A씨는 인공 수정에 동의했다가 이후 변심해서 부인한 것”이라며 “일부 선진국에서도 동의 하에 인공 수정해 출생한 아이에 대해 친자관계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민법 규정을 두고 있다”고 맞섰다. 최 변호사는 “친생 추정의 예외를 확대해서 인정할 경우 국민의 혼인과 가정생활에 미칠 파급효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원고 측 참고인인 차선자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회적 친자관계가 파탄에 이르면 친자 부인을 인정해주는 것이 자녀복리를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피고 측 참고인인 현소혜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공 수정에 동의한 경우 친생 추정을 번복하는 것은 신의칙에 따라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