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대학생 성경공부 모임서 선교단체 구상

입력 2019-05-24 00:09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가 1980년 3월 시각장애인 재활시설인 서울 대린원에서 토요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 세계밀알연합 제공

연합세계선교회 사택에서 지낸 두 달 반 동안 얻은 것이 참 많았다.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익하고 의미 있는 일들이 더 많았다. 그 집 거실은 상당히 넓어서 토요일마다 ‘젊은 선교회’라는 대학생 선교 단체가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한집에 살고 있던 덕분에 나도 그 모임에 가끔 참석했다. 나로서는 대학생들의 성경공부 모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기회였다. 당시 남들에겐 흔하디흔한 모임 중 하나였을지 모르지만 내겐 분명 특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임은 1년 뒤에 밀알을 조직해 내가 대학생과 청년들을 리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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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모임에서 그룹을 나눠 정해진 교재를 갖고 성경을 공부하는 걸 경험했고, 그룹 리더들을 지도자가 미리 만나 예비 교육을 시키는 것이 성경공부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다. 젊은 선교회에서는 매월 소식지를 발간했는데 이 또한 여러 가지를 배우게 했다. 회원들을 한마음으로 묶어주고 정체성을 갖게 하며 구성원들로 하여금 같은 목표와 정신을 공유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현재 하는 일과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주변에 알려 관심과 호응을 얻어낼 수 있는 홍보매체로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은 그 소식지를 통해 매월 재정의 수입과 지출의 상황을 보고했는데 밀알이 공신력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월별 재정보고의 힌트를 바로 거기서 얻었다.

사실 젊은 선교회를 경험하기 전까지 나는 선교단체나 기관을 경험해 본 적도, 활동을 구경해 본 적도 없었다. 그마저도 짧은 기간의 경험에 불과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무엇이든지 보는 대로 빨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했다. 아마 ‘언젠가는 나도 선교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이 모든 것들을 예사로 넘기지 않게 했던 것 같다. 성경공부 교재, 회지 발간, 재정 공개, 모이는 방법 등 선교회를 통해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저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재서 총재(앞줄 가운데)가 1980년 5월 한국밀알선교단 회원들과 장애인 인식개선 운동을 펼치는 모습. 세계밀알연합 제공

소중한 인연들

미국 남가주 밀알의 시작과 발전 과정에 많은 역할을 감당했던 이미영 사모도 거기서 만났다. 젊은 선교회의 핵심 회원이었던 그는 당시 대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내가 그 뒷방으로 들어간 지 며칠 되지 않은 1978년 12월 31일 오후. 그는 회원 몇 사람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아마 추운 뒷방에서 앞도 못 보는 사람이 혼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연말도 되고 하니 위로 차 찾아왔던 것 같다.

그 뒤로 그는 봉사자가 돼 상당히 많은 책을 내게 읽어 줬다. 두꺼운 대학 교재도 여러 권 녹음해 줬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도움이 됐다. 그 후엔 미국으로 가서 살면서 LA밀알이 설립되고 발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아들 정파가 벌써 커서 LA밀알의 단원이 돼 토요일마다 장애아동을 돕는 봉사자가 됐으니 그 시절 그와의 만남도 참으로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그 집을 사무실로 쓰는 성서유니온의 윤종하 총무와 자주 만나 개인적인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유익했다. 그 큰 집에 혼자 지내면서 밤마다 거실 바닥에 꿇어앉아 정말 열심히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개인적인 기도도 많았지만, 장애인 선교를 향한 기도는 더욱 뜨거웠고 절실했다. 꿇어앉아 장애인 선교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불과 10개월 후에 하나님께서 밀알선교단을 설립하게 하셨다. 그때는 그것을 상상도 못했다.

그 시절 그 편지

그 무렵 내가 어떤 분에게 썼던 편지 한 통엔 놀랄만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밀알이 시작되기 8개월 전인 1979년 2월 22일에 그 집에서 쓴 편지다.

‘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저는 이 땅의 그늘진 곳을 위해 선교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100만 장애인이 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집안 수치라고 골방에 숨겨진 채 벌레처럼 살아가는 그들! 혹은 멸시와 천대 속에 거리를 방황하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그들! 그들의 영혼을 향해서도 복음은 증거돼야 합니다. 몇 푼의 구제금으로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어디에도 마음에 드는 사람만, 멋진 사람만, 고상한 사람만, 친한 사람만, 지식인만, 깨끗한 사람만 복음 전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한국교회를 향해 말할 수 있습니다. 호화롭고 아름다운 교회에 비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습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처지에 있으며, 어떻게 그들을 돕고,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니까. 그렇다면 그 분야에 대해 잘 알아서 사명을 갖고 일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는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내 이웃인 100만 장애자에게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에 대한 여러분의 협력을 저는 결코 무의미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이런 엄청난 말들을 편지로 쓸 수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건방지고 도전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당시 나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마침내 그해 10월 밀알선교단을 시작하는 결실로 나타났다.

이재서 박사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