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유정(53)이 2015년 2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한창 ‘종의 기원’(2016)을 집필하고 있던 시기였다. 알려졌다시피 이 작품은 사이코패스 인물을 통해 악의 세계를 파고든 작품. 방송에서 정유정은 ‘종의 기원’을 쓰면서 그리스 뮤지션 반젤리스나 프랑스 그룹 이어러의 노래를 듣고 있다고 했다. 하나같이 장엄하고 비장한 음악들이었다.
DJ가 평소에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메탈을 즐겨 들어요. 북유럽 그룹을 좋아하는데 스산한 노래들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실제로 정유정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퍼뜨린 ‘7년의 밤’(2011)을 쓸 때도 주로 록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메탈 음악을 좋아해서일까. 항상 그의 작품들에서 싸늘한 기운이 묻어나곤 했다. 그렇다면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진이, 지니’를 쓰면서 정유정이 애청한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짐작건대 과거 듣던 음악과는 다른 장르의 곡들이었을 듯하다. 전작들은 책을 쥐어짜면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지만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진이, 지니’는 다르다. 책장을 넘기면 뭉근한 감동을 자아내는, 아프면서도 가없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다랗게 펼쳐진다.
생의 가장 치열했던 사흘에 대한 이야기
소설에 어떤 스토리가 담겼는지 소개하기 전에 책의 끄트머리에 실린 ‘작가의 말’부터 살펴보자. 2년 전 여름, 정유정은 ‘바다에 갇힌 사람들’에 관한 소설을 준비 중이었다. 취재는 거의 끝나 있었고, 책상에는 집필에 참고할 만한 자료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책을 읽다가 한 문장에 시선이 꽂혔다. 어쩔 도리 없이 새로운 차기작을 떠올리게 만든 문장이었다. “시간의 어떤 순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유정은 29년 전,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입원실과 중환자실을 수차례 오가다가 의식을 잃었다. 무의식의 상태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순간”, 즉 죽음이 당신 앞으로 다가오기까지는 3일이 걸렸다.
정유정은 그때를 떠올리다가 노트를 꺼내 이렇게 적었다. “생의 가장 치열했던 사흘에 대한 이야기.” 그는 어머니가 삶의 마지막 3일 동안 의식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마지막 사투를 벌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날들을 되새기다가 새로운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이 책 ‘진이, 지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크게 셋이다. 이진이 김민주 지니. 소설은 이진이와 김민주의 시점에서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드문드문 지니의 시선이 갈마드는 구성을 띠고 있다. 우선 이들 캐릭터의 신상명세나 특징을 간추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이진이: 영장류센터 사육사. 가족도, 애인도 없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목표만 바라보면서 버티는 일을 나보다 더 잘하는 생명체는 지금껏 본 바가 없다”고 자부하는 여성.
②김민주: 청년 백수. 언론사 대기업 공기업 취업에 잇달아 실패하고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지만 낙방. 자식을 한심하게 여긴 가족들에게 떠밀려 집에서 나와 고시원을 전전. 어느 순간 “세상 어딘가에 고시원 밖의 삶”이 있을 거라고 판단해 떠돌이의 삶을 살기 시작.
③지니: 암컷 보노보. 보노보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DNA(98.7%가 일치)를 가진 동물. 지니가 어쩌다 이역만리 한국에 왔는지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정유정이 이들 캐릭터를 통해 만들어낸 이야기를 개괄하자면 이렇다. 진이는 화재 현장에서 지니를 구출해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 순간 진이의 영혼은 지니의 몸으로 옮겨간다. 지니의 몸은 “삶을 두고 벌어지는 두 자아(진이, 지니)의 전쟁터”로 바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진이는 의식을 잃고 누워 있을 자신의 육체를 마주하는 것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민주와 함께 어딘가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자신의 ‘몸’을 찾아 나서는 3일간의 모험을 시작한다. 진이의 영혼은 지니의 몸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달라졌지만 여전한 정유정의 세계
‘진이, 지니’는 경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놓인 경계,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틈새, 육체와 영혼 사이의 공백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어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 ‘모곡’만 하더라도 인터넷 자살 사이트 회원들에게 “꿈을 이룰 최적의 장소”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삶의 가장자리라고, 혹은 죽음의 문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인 셈이다.
정유정의 팬이라면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후반부로 이야기가 치달아가면 어느 순간 코끝이 매워지면서 눈가가 알싸해진다. 따뜻하고 감동적인 작품이다. 과거 정유정의 소설이 스릴러의 문법을 뼈대로 삼았다면 이번 작품엔 스릴러의 얼개에 판타지 소설의 분위기를, 여기에 성장소설의 구조까지 덧대어져 있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 세계가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다. 정유정이 전작들을 통해 줄기차게 던진 물음은 아마도 이런 질문일 것이다. ‘운명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신작 역시 이 같은 질문에 대한 정유정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특유의 작법 역시 여전하다. 1루에서 2루를 향해 내달리는 주자처럼, 어떤 타석에서든 공을 쳐내는 타자처럼 속도감과 정교함을 동시에 갖춘 필력은 신작에서도 명불허전이다. 전작들이 그랬듯 정유정은 캐릭터보다는 독특한 분위기를 띠는 공간을 자세하게 그려내 작품의 정서를 드러낸다. 심리 묘사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특정 상황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주인공이 처한 고립무원의 상황을 실감나게 그린다. 독자들은 정유정의 귀환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정유정에게 따라붙는 가장 흔한 수식어는 ‘이야기꾼’일 게다. 흡인력 강한 서사에 집중한 그의 작품은 많은 독자를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의 등장을 알린 ‘네 심장을 쏴라’가 출간된 게 2009년이니 어느덧 그도 10년이나 활동한 작가가 됐다. 책을 다 읽은 뒤 출판사에서 배포한 정유정과의 인터뷰 자료를 들춰보니 이런 문답이 실려 있었다.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았다.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뭔가.”
“나는 작가라는 호칭보다 소설가로 불리는 게 좋고, 소설가보다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게 좋다. 이야기꾼을 꿈꾸고, 이야기꾼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지난 10년이 이야기하는 방식을 축조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이야기 자체에 더 집중할 생각이다. 내 궁극의 목표인 ‘아름답고 힘 있는 이야기’에 도달할 때까지.”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