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남관표 만나 “한국, 강제징용 관련 적절한 대응을” 요청

입력 2019-05-22 04:01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신일철주금(옛 일본제철)이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난해 10월 30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실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5)씨가 승소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중재위원회 구성을 요구한 일본이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이 외교적 분쟁 해결을 방치하고 있다는 여론전을 본격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에선 중재위를 한·일 정상회담 개최와 연계하는 움직임도 감지되는 등 양국 간 갈등이 더 격화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23일 프랑스 파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연례 각료이사회를 계기로 열리는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중재위 구성과 정상회담 등 양국 현안이 두루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1일 총리 관저에서 부임 인사차 방문한 남관표 한국대사를 만나 양국 간 현안에 대해 한국 측의 적절한 대응을 요청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일본 정부가 전날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한 중재위 구성을 한국 정부에 요청한 뒤 아베 총리가 직접 이에 응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는 양국 관계에 중대한 사안”이라며 “문 대통령이 책임감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재위 구성 절차는 한·일이 1965년 맺은 청구권협정에 명시돼 있다. 협정 3조는 ‘협정에 관한 양국 간 분쟁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되, 안 되면 한·일 양국과 제3국의 중재위원으로 구성된 3인 중재위를 통해 해결하라’고 돼 있다. 중재 요청이 접수되면 30일 안에 양국이 각각 중재위원을 선임하고, 다시 30일 내에 양국이 제3국 중재위원을 지명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양국이 중재위원을 선임해야 하는 시한은 다음 달 28~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 전이다. 일본 정부가 이런 일정을 따져본 뒤 중재위 카드를 꺼내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는 게 현지 언론의 분석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런 절차를 강제성이 없는 임의조치로 보고 있다.

과거 한국 정부도 청구권협정에 근거해 일본에 외교적 협의를 요청한 적이 있다. 헌법재판소는 2011년 8월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및 원자폭탄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분쟁을 해결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위안부·원폭 피해자들이 ‘한·일 청구권협정에는 양국의 분쟁이 있을 때 외교적 노력과 중재로 해결하게 돼 있는데 정부가 이를 게을리해 기본권이 침해됐다’며 헌법소원을 낸 데 대한 결정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일본에 1단계 조치인 외교적 협의를 제안했지만 일본은 응하지 않았다. 일본 역시 이번에 중재위 회부를 요청하기 전 정부 간 외교적 협의를 먼저 제안해왔다.

일본이 상대국 동의 없이 진행할 수 없는 중재위 구성을 꺼낸 건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국제 여론을 유리하게 몰고가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이 그 다음 수순으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방안이 거론되지만 이 역시 한국이 응하지 않으면 재판은 열리지 않는다. 일본이 중재위 개최를 요구하고 ICJ 제소 가능성을 언급하는 건 한국 정부가 응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정부는 일본의 중재위 회부 요청에 “신중히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이런 대응 방침이 문제를 방치하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게 정부 설명이다. 한·일 관계 전문가들도 정부가 일본의 외교적 협의 요청을 사실상 뭉갰던 식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 공세 외교를 펼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항 조치’ 운운하는 일본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정부의 모호한 태도가 불확실성을 키우고 이는 한·일 관계의 관리 부재로 이어져 결국 불신만 키우게 된다”며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명확한 방침을 정하고 중재위가 아닌 다른 외교 채널을 통해서라도 결론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