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가 운용책임을 지는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에 ‘디폴트 옵션’이 도입된다. 구체적 운용지시가 없어도 자동으로 돈을 굴려 수익률을 높이자는 취지다. 퇴직연금 운용에 근로자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기금형 퇴직연금’에도 속도가 붙는다.
더불어민주당 자본시장활성화 특별위원회는 20일 퇴직연금 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1%대의 ‘쥐꼬리 수익률’이라는 비판을 받는 퇴직연금 제도를 수술해 노후보장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다. 자본시장특위는 디폴트 옵션 도입을 위해 관련 입법에 나설 예정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지난해 4월 이미 정부입법으로 법안 발의 상태다.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받아야 할 퇴직금을 금융회사에 맡기고, 기업이나 근로자가 운용방법을 결정해 운용하다 퇴직 시 지급하는 제도다. 사용자(기업)가 적립금 운용방법을 결정하고 운용결과에 책임을 지는 확정급여(DB)형, 근로자가 운용방법을 정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DC형으로 나뉜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 말 기준 190조원에 이르지만, 수익률이 낮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수익률은 1.01%로 은행 정기예금 금리에도 못 미쳤다. 최근 5년(2013~2017년) 평균 수익률도 2.33%로 국민연금 수익률(5.20%)을 밑돌았다. 운용지시를 내려야 할 근로자·기업의 무관심, 연금을 굴리는 금융회사의 노력 부족이 합쳐진 결과다.
이에 따라 민주당 자본시장특위는 연금자산 방치를 막는 수단으로 ‘디폴트 옵션’ 카드를 꺼내들었다. DC형 퇴직연금에 적용하는 디폴트 옵션은 근로자의 운용지시가 없어도 금융회사가 사전에 결정된 운용방법으로 알아서 자산을 굴려준다. 디폴트 옵션 가입 여부는 근로자 선택에 맡긴다. 자본시장특위는 “DC형은 근로자가 직접 운용지시를 해야 하기 때문에 퇴직연금 도입 당시 운용지시 부재 문제를 보완하는 디폴트 옵션이 함께 도입됐어야 했다”며 “누락된 걸 늦게나마 보완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디폴트 옵션은 이미 미국 호주 등에서 활용하고 있는 제도다. 미국은 디폴트 옵션으로 설정할 수 있는 상품의 구체적 운용전략을 노동부에서 사전에 지정한다. 운용 손실에 따른 법적 분쟁 가능성 때문에 대부분 기업이 부정적이었지만, 2006년 디폴트 옵션을 설정할 경우 기업에 책임을 묻지 않는 면책 조항이 신설되면서 제도가 정착됐다. 칠레는 성·연령에 따라 선택 가능한 펀드 유형이 제시된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비교적 보수적인 펀드가 디폴트 옵션으로 설정되지만, 가장 보수적인 펀드가 설정되진 않는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자본시장특위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은 ‘계약형 퇴직연금’을 채택하고 있다. 기업이 직접 금융회사와 계약을 맺고 퇴직금 운용을 위탁하는 방식이다. 운용이 단순하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근로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근로자는 퇴직연금 설정에만 동의하고 기업이 기존 대출거래 등 이해관계에 따라 금융회사를 선정하는 일이 많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하면 노·사가 별도의 수탁법인을 설립해 연금을 관리한다. 운용은 금융회사에 위탁할 수 있다. 위탁 금융회사 결정 등은 근로자와 사용자,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수탁법인 이사회의 몫이다. 자본시장특위는 근로자 참여권이 확대되고, 각 금융사가 위탁계약을 따기 위해 수익률 경쟁에 나설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퇴직연금 규제를 완화하면서 위험자산 투자한도가 늘어났던 국가들에선 수탁자책임을 놓고 법적 다툼이 발생하기도 했다. 보험연구원 류건식 선임연구위원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수탁자책임 위반 소송의 발생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으므로 사전 대비를 충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임주언 신재희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