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밤 입양기관 현관에 놓였던 아기, 시인으로 돌아오다

입력 2019-05-20 19:55
해외한인작가 초청 문학축제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에서 20일 발제를 한 재미교포 시인 신선영씨. 그는 “급속한 사회 변화가 많은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안겨준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1975년 한겨울 추위가 매섭던 1월 17일 밤, 누군가가 서울 홀트아동복지회 사무실 문 앞에 아기를 두고 갔다. 바로 다음 날 이 아기에 대한 해외입양 서류가 작성됐다. ‘출생지: 미상, 이름: 미상, 성별: 여자, 생년월일: 약 8개월, 특이사항: 빨간색 바지, 핑크색 스웨터, 핑크색 조끼를 입고 유기된 채 발견됨.’ 이 아기는 미국의 한 백인 가정으로 입양됐다.

재미교포 시인 신선영(44)씨의 생애 첫 공식 기록이다. 신씨는 22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올해 처음 열리는 한국문학번역원 주최 해외한인작가 초청 문학축제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 참석차 방한했다. 다섯 번째 고국 방문이다. 그는 20일 첫 세션 ‘이산과 삶’에서 “한국 태생의 미국 시민이자 문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 세상의 내 자리를 이해하는 것이 평생의 여정”이라고 말했다.

예술학과 교육학 석사를 받은 그는 현재 미국 햄린대 석사 과정에서 문예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지난 학기엔 한강의 ‘흰’을 교재로 쓸 정도로 한국 문학에 관심이 많다. 작가는 “부모와 혈통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에 내 인생 한가운데에는 결핍이 자리하고 있다. 심리학자 폴린 보스는 이런 종류의 슬픔을 ‘모호한 상실감’이라고 명명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시안아메리칸문학상을 받은 ‘온통 검은색인 치마’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광채’ 등 그의 시집 3권은 상실의 정서가 주조를 이룬다. “작품 속에서 주로 탐구해온 주제인 비애, 단절, 언어 손실, 민족주의 등은 내가 한국에서 법적으로 고아였던 상황에서 많은 부분 유래한다”고 했다. 작가는 가족 상실의 아픔과 조국에 대한 단절감을 문학의 자원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작가는 세션 전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도 내 안에 있는 슬픔의 근원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이민 작가라는 복잡한 정체성 속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작가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내 삶의 역사와 문학적 재능을 통해 어린이와 소외 계층에게 봉사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이민 작가로서 사명감을 소중히 여긴다. 시를 인권으로서 인식하는 단체인 ‘시로의망명’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딸(22)과 아들(18)을 데려왔다. 첫 동행이다. “예술을 전공하는 딸은 한국영화 제작에 큰 관심이 있고, 고등학생인 아들은 한국의 PC방을 매우 신기해 한다”며 활짝 웃었다.

그의 시는 일부가 번역됐을 뿐 시집 전체가 국내에 번역되진 않은 상태다. “내 작품이 한국에 출판된다면 정말 감동적일 것 같다”고 했다. 생모를 만난다면 무엇을 묻고 싶은지 궁금했다. “어머니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입양시킨 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 말리 홀트 이사장의 17일 별세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서양인으로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참 존경스럽고 여성으로서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