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은 드로잉을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조명하는 ‘素畵(소화)-한국 근현대 드로잉’전(6월 23일까지)을 열고 있다. 근대 여명기의 구본웅 이인성에서부터 근현대 대표 작가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을 거쳐 1990년대 이후 페미니즘 작가로 부상한 윤석남에 이르기까지 국내 작가 200여명의 300여점을 전시한다. 출품작의 90%가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 경기도 의정부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정신과 의사 김동화(50)씨다. 최근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20대 후반의 어느 날이었어요. 서점에 책을 보러 갔다가 옆 코너에 있던 화집을 들춰보게 됐어요. 어떤 충격이 오더라고요. ‘문자 언어가 아니라 (선과 색이라는) 전혀 다른 언어로 감정적인 임팩트를 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그 오묘한 세계를 알고 싶었던 그는 퇴근 후 서점에 들러 미술책을 사보는 일과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해서 미술책 몇 백권을 보게 됐다. 책을 섭렵하고 나니 실제 그림이 보고 싶어졌다. “미술 하면 인사동이지”하는 말을 듣곤 인사동 화랑가를 순례하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체계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에 화랑 지도를 만들었다. 서울을 ‘마스터’한 뒤에는 전국을 돌았다.
“전국의 화랑 지도가 그려지니까. 그림을 한번 가져봤으면 하는 소망이 생기더라고요.”
하지만 레지던트 100만원 월급으론 언감생심이었다. 유화는 당시의 인기 작가 최영림 박고석 임직순 등의 작품이 호당 100만∼350만원했다. 10호짜리를 사려고 해도 최소 1000만원은 있어야 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화랑가를 돌던 어느 날, 모 화랑에 걸린 박수근의 연필 그림이 확 들어왔다. 무뚝뚝한 선이 정겹게 느껴졌다. 그 소묘를 맘에 두고만 있었는데 아트페어인 화랑미술제에 그 작품이 나왔지 뭔가. 가격은 400만원. 점심값까지 아껴가며 모은 300만원이 전부였다. 화랑 주인이 사정을 듣더니 말했다. “여깄소, 당신 거요.”
드로잉은 밑그림 정도로 치부하고 미술 작품으로 쳐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처음엔 주머니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형편이 좋아진 뒤에도 유화의 끈적끈적한 느낌과 달리 담담한 느낌이 좋아 소묘를 수집했다. 그저 모으지는 않았다. 수집품을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정리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수집품을 정리한 에세이 ‘화골-한 정신과 의사의 드로잉 컬렉션’(2007)을 냈고, 미술평론집 ‘줄탁’(2014)도 냈다. 2015년에는 전시기획까지 했다. 컬렉터로 출발해 평론가, 기획자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1주일에 4, 5차례는 퇴근 후 득달같이 화랑가로 달려간다. 미술이 당신에게 뭐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림은 나를 휘감고 있는 어떤 것이지요.” 미술 ‘덕후’의 기쁨이 느껴졌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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