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시부모님과 한 살 아래인 시누이 등 다섯 식구가 함께 살았다. 주위 사람들은 힘들텐데 어떻게 같이 살 생각을 했느냐고 걱정했지만 나는 ‘전도하려고요’ 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내 삶의 초점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에 있었다. 집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선생님들과 신우회 모임을 갖고 퇴근 후엔 근처 대학교에 나가 노방전도를 열심히 했다. 벌을 받는 아이들에게 성경구절을 읽게 하고 감상문 쓰는 것을 반성문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이성적이고 까칠한 수학교사인 선생님이 신우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가정을 예배의 처소로 세울 수 있겠다는 소망으로 그분과 결혼을 했다. 영혼구원이란 생각으로 시작된 시집생활은 처음엔 정말 좋았다. 어머님은 친딸 같이 대해주며 집안일을 도맡아 해주었고 예수님 잘 믿는 며느리가 집에 들어오니 너무 좋다고 하셨다. 그러다 첫 아이를 출산하고 휴직하니 갑자기 경제적 난관에 부딪혔다. 남편 월급은 대출이자로 나가고 아이 기르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 옷도 거의 사 입히지 못했다.
무엇보다 시누이는 나를 무척 시험 들게 했다. 뭐든 남에게 나눠주는 걸 좋아한 시누이는 본인 것이 아닌 내 것도 막 퍼 주었다. 집안 곳곳을 살펴 뭐 나눠줄 게 없나 찾아다니고 교회생활관에 치약, 칫솔, 비누 등 생필품은 물론 집에서 쓰는 진공청소기도 주려고 하는 등 퍼나름은 도가 지나쳤다. 심지어 우리 아이 입힐 원피스도 친척에게 주었고 ‘나 오빠방의 서랍에 있는 돈으로 어항 샀다’고 할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왜 어른들이 같이 사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는지 실감됐다. 그러나 시집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함께 사는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지만 언제 분가할 지 모르는 상황 속의 하루하루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러다 겨울 수련회 때 어느 자매가 ‘부활의 표적밖에는 없다’는 말씀에 이제야 눈이 떠졌다는 간증고백이 마음에 닿으며 부활의 표적밖에 없다는 사실이 내게 선명히 비춰졌다. 부활은 그냥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가신 천지창조보다 더 큰 사건이었다. 부활이 실제가 되니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전능자의 피라는 것도 바로 알게 됐다. 창조주께서 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는 그동안 내 머리로 헤아리며 하나님을 원망했음이 비춰지며 바로 엎드려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했다.
그러자 전능자의 생명을 걸었던 사랑이 온몸에 부어졌다. 하나님은 내 행위와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셨고 또 늘 함께하셨다. 아이가 아파 병원에서 힘들어할 때도, 교회 자모실에서 말씀을 잘 듣지 못해 위축돼 있을 때도 그분은 나와 함께 계셨다.
삶 또한 자연스레 정리됐다. 무엇보다 시누이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됐다. 아가씨의 퍼나름의 은사를 누구보다 많이 공급받은 자가 나였기 때문이다. 아이 둘을 기르는 여건에서도 끊임없이 말씀으로 세워주려 했던 아가씨의 중심이 그대로 알아졌다. 아이가 아파 교회를 가지 못했을 때도, 수련회 참석을 못했을 때도 늘 말씀을 정리해 전해 주었던 아가씨. 서로 미안했다고 얘기할 때는 정말 눈물만 나왔다.
또한 하나님께선 우리 가정에 작은 교회도 세워주셨다. 아버님은 ‘예수님을 믿으려면 우리 며느리처럼 믿어야 한다구’라는 말씀을 자주하신다. 남편은 학교에서 기독교 동아리를 세워 제자양육을 하는 사명자로 우뚝 섰고, 어머님은 만나는 이웃 주민들께 전도지를 나눠주며 전도에 열심이다. 나는 오늘도 시집에 들어와 살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멋진 동역자의 가정환경을 내게 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다.
김혜정 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