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이후 평생 신어온 스케이트화를 벗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상화(30)는 망설였다. 지난 3월 말 은퇴식을 열기로 계획했다가 급히 무르기도 했다. 그토록 오래 스피드스케이팅을 탔지만 아직도 선수로서 미련과 간절함이 남아서였다. 하지만 무릎이 버텨주질 못했다. 이상화는 “‘빙속 여제’라 불리던 최고의 모습만을 기억해달라”며 기나긴 질주에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최초로 올림픽 2연패를 이룬 이상화가 16일 은퇴했다. 이상화는 이날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스케이트 선수로서 마지막 인사를 드린다”라며 고별사를 전했다. 그는 인사말을 하는 내내 아쉬움에 목이 멘 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열다섯이던 2004년 태극마크를 처음 단 이상화는 이후 ‘최초’와 ‘최고’를 독식했다. 이상화는 주 종목인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10여년간 홀로 달렸다. 2010 밴쿠버 올림픽에서 정상에 오르며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4년 뒤 소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아 선수로 처음 2연패를 달성했다. 지난해 평창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이상화는 선수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소치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때를 꼽았다. 이상화는 “세계신기록을 세운 선수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는데, 2013년 신기록을 세우고도 이듬해 소치에서 이를 깼다”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올림픽 2연패를 해냈다는 점에서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당시 세운 세계신기록은 여전히 유효하다. 2013년 11월 국제빙상연맹(ISU) 월드컵 대회에서 그가 작성한 36초36은 지금도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의 최단 기록이다. 이상화는 “내 욕심이겠지만 기록이 영원히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빙속계의 일인자로서 짊어져야 했던 부담감은 컸다. 이상화는 “대회에서 2등만 해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압박감을 견뎌내며 마음을 다잡는 일이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는 컨디션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아 매일같이 잠을 설쳤다.
점차 심해지는 무릎 부상도 이상화를 괴롭혔다. 평창 올림픽 이후 수술을 하려 했지만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말에 관뒀다. 그러나 재활과 약물치료만으로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상화는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더라. 최고의 기량을 보여드릴 수 없을 것 같아 은퇴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오랜 벗이자 라이벌인 고다이라 나오(33·일본)도 이상화의 은퇴를 아쉬워했다. 이상화는 “제가 은퇴한다는 기사를 보고 나오가 깜짝 놀라 ‘잘못된 뉴스였으면 좋겠다’며 연락을 해왔다”고 했다. 이어 현역에서 뛰는 고다이라의 선전을 기원했다. 2022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할지 고민했던 이상화는 스피드스케이팅 해설위원이나 대표팀 코치로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나타냈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