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 ‘마이라이프’ 서문에는 클린턴이 자신을 규정해놓은 유명한 두 문장이 나온다. “나는 나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은 못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가장 가혹한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나쁜 사람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중요한 건 첫 번째 문장이다. ‘나는 나쁜 정치인이 아니다’는 말은 모든 정치인이 늘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렇게 좋은 정치인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열광적 지지자들과 혹독한 적대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자의식이 클린턴을 조금 더 나은 정치인이 되도록 했다.
요즘 한국 정치인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자기 자신은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정치인이다. 상대방은 가혹한 비판자들의 주장보다 더 나쁜 정치인이다. 그래서 생각이 다른 정파와 정당을 규정할 때 동원되는 것이 온갖 낙인찍기와 조롱, 막말이다.
‘달창’(달빛창녀단·문재인 대통령 지지자에 대한 멸칭), 도둑놈, 사이코패스. 최근 여야 국회의원들이 주고받은 발언들이다. 육두문자만 나오지 않았을 뿐 욕설 직전까지 간 막말이다. 여기가 최저점인가 싶으면 다음날 새로운 막말이 또 터져 나온다. 취재하는 기자도, 뉴스를 전해 듣는 국민도 정치 혐오에 걸릴 지경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지난 14일 문 대통령을 영화 ‘어벤져스’에 나오는 ‘타노스’에 빗대 ‘문노스’라고 불렀다. 타노스는 생명체 절반을 절멸시키려는 절대 악이다. ‘좌파독재’, ‘제2의 베네수엘라’ 등의 표현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것일까. 나 원내대표의 눈엔 문 대통령은 우주적 거악이고, 그 지지자들은 ‘달창’이다. 한국당의 논리 안에서 자신들의 장외투쟁은 ‘성전’이 된다. 여당과 타협하는 것은 악과 손을 잡는 것이 된다.
한국당에는 못 미치지만 민주당도 아슬아슬하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한국당을 향해 “도둑놈들한테 국회와 이 나라의 장래를 맡길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이 대표가 ‘민주당 20년 집권론’을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의 논리 안에서는 필연적이다. 도둑놈들은 감옥에 가야지, 집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이라는 정의당도 ‘낙인찍기’에는 뒤지지 않는다. 이정미 대표는 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향해 공개적으로 ‘사이코패스’라고 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상태를 일컫는다’고 설명하면서 ‘뭐가 문제냐’는 태도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도 한국당 나 원내대표를 ‘토착왜구’라고 원색 비난한 바 있다.
결국 여야의 상호 비난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문노스’가 통치하고 제1야당은 도둑놈들이며 그 당은 사이코패스와 토착왜구가 이끌고 있다. 생지옥이 따로 없는 것이다. 여야 모두 정치 언어에 있어서만큼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상태’다. 어떻게 하면 상대 당을 더 화나게 하고, 약 올릴 수 있을까에 모든 정치적 에너지가 쏠리고 있다.
정치인이 양극단으로 나눠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면 국민도 따라 분열된다. 정치 뉴스 댓글을 보고 있자면, 여야로 편이 갈린 지지자들의 상호 증오가 내일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다. ‘협치’를 앞세웠던 20대 국회가 결국 ‘국민 갈라치기’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과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제목의 책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핵심 규범으로 ‘상호 관용’을 꼽았다. 상호 관용은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라고 설명했다. 상대 당을 적이 아니라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파트너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총선을 앞두고 정당 간 경쟁이 불가피하겠지만 ‘멋진 경쟁’을 해야 한다”고 했다. 상호 관용이 ‘멋진 경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선의의 경쟁으로 돌아가야 한다. 각 당 지도부들부터 말을 아끼고 가려서 했으면 한다. 막말은 막말로 이길 수 없다.
임성수 정치부 차장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