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상큼한 느낌의 말이다. 우리는 야망의 시대를 지나왔다. 빛나는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구차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청춘의 자세였다. 여유와 품위, 맛있는 음식과 멋진 휴가 등 모든 행복은 내일로 미루고 살았다. 빛나는 내일의 기대가 오늘 이를 악물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청년들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미래의 전망이 사라진 것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이 고생이 내일의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는 믿음이 있을 때나 통하는 말이었다. 그 믿음이 희미해진 지금 젊은이들이 일상에 눈을 돌리고, 소소한 행복을 찾기 시작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향을 음미하거나, 텃밭을 가꾸며 방울토마토가 잘 익어가는 것을 보는 것, 자녀와 동네 길을 산책하며 대화하는 것, 큰 목표를 이루려 자신을 압박하고 괴롭히던 어리석음을 벗어나 작고 소소한 일에서 행복을 찾자는 주장은 소중한 지혜이다.
문제는 소확행의 이상이 ‘소(小)’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確)’에 있다는 사실이다. 큰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 대신 확실성을 붙잡자는 계산이 이 말에 숨어 있다. 욕망의 크기를 줄이면 행복을 느낄 가능성이 커지겠지만, 확실해지지는 않는다. 따사로운 햇살, 감미로운 음악과 커피향이 일품인 카페의 시간이 최고의 행복인 사람이 어느 날 같은 곳을 찾았는데 전혀 무감해지는 그런 날도 있다. 어떤 음악이 소음처럼 들리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세상에 확실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더욱 그러하다. 알베르 카뮈는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무엇이 행복일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에 몰두해 있는 사람은 대체로 불행한 사람들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는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부산물”이라고 했다. 의미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따라오는 것이 행복이다. 자전거를 타고 오솔길을 갈 때 숲을 지나온 바람이 뺨을 스치는 느낌이 행복이다. 그걸 붙잡기 위해 멈추면 그 느낌은 이미 가고 없다. 힘들어도 페달을 밟다 보면 그 느낌은 또 찾아올 것이다. 행복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면 행복은 멀리 간다. 행복을 확보하려는 욕심은 행복을 더 멀리 쫓아 보내는 어리석음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소확행에서 배울 게 많다. 성공한 어른들, 고지는 정복했을지 모르지만 올라오는 길에 핀 꽃들과 멋진 바위 하나도 보지 못했다. 큰 집은 샀지만, 그 집에 들어온 아침 햇살을 즐겨본 기억이 없다. 어디에 아파트를 사야 오른다는 후각은 발달했지만, 아이들 웃음을 듣고 그 기쁨을 아는 미각은 퇴화했다.
교회도 반성해야 한다. 대박과 인생역전을 꿈꾸던 개발시대의 부흥회는 땅 사서 부자 된 이야기, 헌금 많이 해서 축복받은 간증으로 넘쳐 났다. 뒤이어 하나님을 위해 고지를 정복하자는 식의 설교가 야망을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성행했다. 그때의 신앙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혼탁함 가운데 순수한 열정도 있었고, 성장과 번영의 담론이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교회 성장에 기여한 면도 있었다. 문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한계는 우리에게 차분히 일상의 가치를 돌아보기를 요구하며, 그 요구는 성경이 처음부터 말해 온 영성으로 돌아가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젊은이와 기성세대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행복을 아는 감수성이다. 행복감을 확보하기 위해 무엇을 사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를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이다. 무엇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 기뻐하는 삶을 사는 일상의 영성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여유 있는 웃음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