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일신여학교가 앞장선 태극기 물결, 경남 곳곳으로 번져

입력 2019-05-16 00:02 수정 2019-05-16 00:25
1919년 3월 11일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기념촬영한 사진. 부산진교회 제공

부산은 전국에서 비교적 늦게 3·1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1919년 3월 11일 부산진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을 계기로 불붙은 만세시위는 밀양 울산 김해 창원 등 경남 일대로 퍼져나갔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여학생과 성도들, 목회자까지 가담했던 부산의 만세시위는 신사참배 거부 등 교계의 강한 항일정신으로 이어졌다.

지난 10일 부산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시작된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찾아갔다. 전철역에서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서자 벽면에 그려진 태극기를 흔드는 소녀들과 커다란 태극기 그림이 보였다.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자 왼쪽에 탄탄한 균형감이 돋보이는 근대식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진일신여학교, 호주 선교사들이 1892년 고아원으로 시작했던 경남 최초의 근대식 여성교육기관이다. 학생수가 늘어 1905년 서양식으로 세운 건물은 2003년 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55호가 됐다.

부산 동구 좌천동 옛 부산진일신여학교 건물 전경.

마침 이날 울산대영교회에서 부산의 기독교 역사를 탐방하러 온 초등학교 5~6학년생 30여명이 학교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1919년 3월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1919년 3월 11일 오후 9시 김응수 송명진 김순이 김란출 김봉애 등 11명의 학생은 교사 주경애 박시연과 함께 조용히 거리로 나왔다. 이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이들이 태극기를 그린 옷감은 학생 김반수의 부모가 딸의 혼수용으로 마련해뒀던 옥양목이었다. 이렇게 만든 태극기 50여개를 좌천동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나눠준 뒤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 군경에 체포된 이들은 부산형무소에 갇힌 뒤 매일 나체로 검사를 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학생들은 징역 6개월, 교사들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동래고보 만세운동 등 부산 곳곳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신충우 부산진교회 목사가 지난 10일 매일신보 1919년 3월 14일자에 소개된 기독교인들의 만세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이 학교 맞은편엔 부산진교회가 있다. 부산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는 긴밀하게 연관돼 있었다. 부산진교회 역사위원회가 과거 교회 당회록과 역사적 사료를 토대로 편찬한 ‘부산진교회 항일운동사’를 보면, 교사 박시연은 이곳 교회학교 교사였다. 학생 중 김순이 이명시는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나머지 6명은 교회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부산진교회 신충우 목사는 만세운동 직후 발행된 3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십일일 오후 아홉시경 부산진에서 야소교도가 대부분인 약 백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개시했다”고 실린 대목을 보여줬다. 신 목사는 “학생뿐 아니라 어른까지 많은 기독교인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것은 그 당시 민족의 아픔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품으려 했던 또 다른 신앙의 고백이었다”고 말했다.

윌리엄 베어드(배위량)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초량교회에선 2대 정덕생 목사와 윤현태 장립집사, 그의 동생 윤현진 집사 등 교회 지도자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교회는 영선현교회 영주동교회에 이어 3·1운동 이후 ‘초량3·1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곽원섭 은퇴장로는 교회 역사관에서 자료를 보여주며 “일본 경찰들이 따져 물으면 삼위일체에서 따와 3·1교회라 한다고 설명했으나 교회 폐쇄 위협까지 당하자 초량교회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부산진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을 주도한 주경애 교사도 이 교회 성도였다고 한다.

김대훈 부산 초량교회 목사가 이날 교회 외벽에 붙어있는 교회 및 3·1운동의 역사 안내판을 소개하고 있다.

초량교회는 특히 안희제 선생이 세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중심으로 상해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하는 군자금 모금에 깊숙이 관여했다. 3·1운동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이던 윤현진 집사는 그해 3월 압록강을 거쳐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미국인 의료선교사 찰스 어빈(어을빈)의 도움을 받아 사재 30만원, 당시 전투기 4대 값을 들고 갔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재무차장으로 재정을 총괄했으나 2년 뒤 병사했다. 정덕생 목사도 이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1922년 2월 평북 중강진경찰서에 16일간 투옥됐다 풀려났다. 초량교회 김대훈 목사는 “여학생들이 시작한 부산의 3·1운동은 초량교회 정덕생 목사와 성도들의 항일 운동, 주기철 목사님의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이어졌다”며 “선조들의 아름다운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교회 본질을 잘 지켜나가도록 성도들과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