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지난해 11월 일본 국적의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여사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했다.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의 부인인 가네코 여사는 식민지 조선의 처지에 공감하며 박문자(朴文子)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남편 박 의사와 함께 일왕 부자 폭살을 목적으로 폭탄 반입을 시도하다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옥살이하던 중 1926년 옥중에서 23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세상을 떠난 지 92년 만에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박열의사기념관은 지난해 4월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로 가네코 여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졌던 때다. 보훈처는 2008년 자체 발굴을 통해 보훈 심사를 진행하다 결국 보류했었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던 가네코 여사의 활동을 온전한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박열의사기념관에서 포상 신청 실무 작업을 주도한 것은 당시 학예사로 근무하던 김진웅(30)씨였다. 2016년 초부터 가네코 여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김씨는 지난해 2월 가네코 여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마침 서훈 신청을 준비하던 기념관에 학예사로 입사했다.
김씨는 치밀하게 서훈 신청을 준비했다. 그동안 확보한 자료 원문과 번역본을 하나씩 첨부한 뒤 독립운동과 관련된 부분에 모두 밑줄을 그어 표시했다. 가네코 여사 개인 신상자료나 재판기록은 물론이고 과거 신문기사와 관련 인사들 회고록까지 모두 모았다. 준비한 서류만 A4 용지 1000장 분량이었다. 김씨는 “과거 심사가 보류됐다는 얘기를 들어서 혹시나 서훈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며 “그동안 연구한 자료를 모두 첨부한다는 생각으로 자료를 정리했다”고 말했다.
100년 전, 그것도 일본인의 한국 독립운동 흔적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씨는 가네코 여사가 단순한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것을 증명해내야 했다. 가네코 여사가 직접 발간했던 잡지와 1972년 일본에서 출판된 가네코 여사 재판기록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이 가네코 여사의 글을 검열하면서 민감한 부분을 검은색 펜으로 덧칠했는데, 김씨가 직접 돋보기를 들고 덧칠된 글자를 식별해내기도 했다. ‘조선○○기념일’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총탄’ ‘만세’ ‘검속자’ 등의 단어를 찾을 수 있었다. 김씨는 “글의 작성일이 1923년 3월 2일이고, 확인된 단어들을 고려하면 3·1절을 기념해 조선인들의 행동을 고양한 글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기념관에서 제출한 서류에 가네코 여사의 제적등본 등 구하기 어려운 개인 신상에 관한 자료가 여럿 포함돼 있었다. 기존 자료에다 새로운 자료를 참고해 의미 있는 심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왜 이렇게까지 일본인의 서훈에 몰두했을까. 김씨는 “외국인이어서도 아니고 여자여서도 아니다.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역사적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며 “연구를 진행하면서 가네코 여사의 말과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현재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씨는 가네코 여사를 통해 한·일 양국의 연대를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일본 사람을 악의 존재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인들을 돕고 같이 활동한 일본인도 많았다”며 “앞으로 재일조선인들의 독립운동과 그 과정에서 함께 활동한 일본인들의 관계를 연구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