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한은은 아니라는데… 시장 흔드는 ‘리디노미네이션 괴담’

입력 2019-05-13 04:03

60대 A씨는 이달 초 지인에게 “종로 금시장에 금이 없다”는 소문을 전해들었다. 지인은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화폐 액면단위 조정) 얘기가 나오면서 실물자산인 금을 사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귀띔했다고 한다. A씨는 “가능성이 극히 적다해도 미리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며 “부동산 쪽에선 압구정 아파트 물량이 사라졌다고도 한다”고 했다.

금 거래량이 급등하는 등 시장에서 실물자산을 선호하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 불안정한 경제 상황과 더불어 리디노미네이션 가능성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행과 정부가 강력히 부인했지만 여전히 그 여파가 남아 있다는 시각이다.

12일 만난 종로 귀금속 거리의 상인들 사이에서도 부자들이 고액 단위의 금을 사들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규모가 ‘수십억원 대’라는 말도 나왔다. 종로에 위치한 사설 금거래소 관계자는 “골드바를 보통 5영업일 이내 공급했는데 주문이 밀려 최대 한 달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며 “은 판매량은 이미 지난달에 지난해 1년치 판매량을 넘어섰다”고 전했다.

개인이 금을 사들이는 현상은 국가 공인 금 현물마켓인 한국거래소(KRX) 금시장에서도 확인됐다. 지난달 중순부터 금 거래량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올해 1월부터 지난달 14일까지 KRX 금시장의 일평균 거래량은 17.8㎏였다. 4월 15일부터 5월 10일까지 일평균 거래량은 34.2㎏으로 92.1% 증가했다.

같은 시기 개인 순매수량도 늘었다. 1월부터 4월 14일까지 마이너스를 기록했던 매수량은 4월 15일~5월 10일 156.7㎏으로 상승했다. 김상국 KRX 금시장팀장은 “금값이 오르는 폭이 낮은데도 거래량이 크게 늘었다”며 “개인들이 금을 사들이는 걸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액자산가의 재무설계를 담당하는 프라이빗뱅커(PB)들 역시 리디노미네이션 관련 상담이 늘었다고 했다. 한 증권사 PB는 “부유층은 재테크보단 자산 가치에 영향을 미칠까봐 관심이 많다”며 “고객 문의가 많았지만 정부가 부인한 만큼 지켜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단위를 축소하는 화폐개혁의 일종이다. 현재 1000원을 1원으로 바꾸는 식이다. 소비심리에 영향을 미쳐 부동산 파동이나 물가 상승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지난 3월 국회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언급한 이주열 한은 총재는 이후 “원론적 차원의 답변이었다”며 추진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홍남기 부총리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현재 상황에서) 논의할 일이 전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전문가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리디노미네이션 발언이 안전자산을 찾는 촉매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화폐단위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자산 규모가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며 “현금 자산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보니 리디노미네이션이 거론되면 실물자산으로 바꾸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리디노미네이션을 실물자산 투자 경향과 연결할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제학과 교수는 “금융시장이 불안한 상황에서 부동산 투자도 어렵고 주식시장에 투자도 못하니 안전한 금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에 대한 불신이 높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실책”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는 13일 리디노미네이션 정책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최운열 심기준 의원, 자유한국당 박명재 김종석 의원, 국회입법조사처가 공동 주최자로 이름을 올렸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리디노미네이션이 공론화되더라도 현실화되기는 힘들다”며 “이미 위험변수가 많기 때문에 화폐개혁까지 더해지면 경제적 충격이 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은 박세원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