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팹시티(Fab City)’에 도전한다. ‘fab’은 제조, 제작, 생산 등을 의미하는 ‘fabrication’의 약자로 팹시티는 ‘제작도시’ 정도로 번역된다. 그동안 도시를 대표하는 말은 ‘소비’였다. 팹시티는 근래 세계적으로 형성된 메이커 문화를 적극 끌어들여 소비도시에서 제작도시로의 전환을 추구하는 새로운 도시운동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7월 바르셀로나, 파리, 암스테르담, 보스턴 등 세계 28개 도시가 회원으로 있는 팹시티네트워크에 가입했다. 이어 은평구에 위치한 서울혁신파크를 ‘팹시티 실험지구’로 지정했다.
서울혁신파크에서는 지난 6일부터 ‘팹랩 아시아 네트워크 콘퍼런스 5(FAN 5)’가 열리고 있다. 11일까지 이어지는 FAN 5는 아시아 최대의 팹시티 축제로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팹시티 행사이기도 하다.
행사가 열리고 있는 서울혁신파크는 거대한 ‘팹랩(fab lab·제작공방)’으로 변신했다. 식량도시, 에너지도시, 나무도시, 흙의 도시, 재생도시, 섬유도시, 비전화도시까지 7개의 ‘팹시티 캠퍼스’가 설치돼 메이커문화가 열어갈 도시의 ‘낯선 미래’를 보여준다.
팹시티는 도시의 새로운 가치로 지속가능성과 자급자족을 추구한다. ‘식량도시’ 캠퍼스에서는 PVC 관으로 만든 수경재배 키트 안에서 자라는 채소들을 볼 수 있다. ‘퍼스널 푸드 컴퓨터(PFC)’라고 불리는 상자도 눈길을 끈다. 플라스틱 상자 안에 20여 가지의 장비를 설치해 광량, 이산화탄소 농도, 온도, 습도 등을 조절해 가며 바질을 키우고 있다.
‘흙의 도시’ 캠퍼스에서는 흙벽돌을 만들고 벽을 쌓아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흙의 도시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김성원(크리킨디센터 미장공방 마스터)씨는 “흙과 기본적인 건축기법만을 이용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흙은 가장 오래되고 친환경적인 건축 자재이며 흙으로 10층 높이까지 건축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옆 ‘나무도시’에는 나무 막대기를 이어 붙여서 만든 돔형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다. 나무와 끈만 이용해서 기둥도 세우지 않고 거대한 유선형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도시건축에서 제외돼 가는 나무라는 자재의 유용성을 입증하고 있다.
‘섬유도시’에는 버려진 옷들을 압축해서 만든 타일이 전시돼 있다. 둘러보던 시민들은 “타일이 단단하냐?” “한 장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 등 질문을 쏟아냈다. 제작자는 “거푸집에 폐의류를 넣고 손으로 눌러서 타일을 만들었다”면서 “좀더 높은 압력으로 누를 수 있다면 보다 단단한 타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FAN 5를 기획한 구혜빈 서울이노베이션팹랩 팀장은 팹시티를 “도시의 자원 사용방식에 대한 전환과 재구성을 통해 지속가능한 새로운 도시 모델을 만들기 위한 실험”이라고 설명했다.
해외 도시들이 팹시티를 선언하며 내건 목표를 보면 이들이 추구하는 바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파리팹시티는 2030년까지 탄소발자국 40% 감소,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20% 농지 확충, 친환경 운송수단 개발 및 보급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헬싱키팹시티는 도시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가 주요한 목표인데 2030년까지 40%, 2095년까지 80% 감축한다는 계획이다.
팹시티라는 새로운 도시운동의 배경에는 메이커 문화가 있다. 세계적으로 메이커 문화가 부흥하면서 제작자, 제작문화, 제작공방, 메이커 스페이스, 팹랩, 패브리케이터 등의 용어들이 새로 등장하고 있다.
김성원씨는 경제위기, 해커문화, 소비문화에 대한 반성, 자급자족에 대한 관심, 도구적 인간에 대한 열망, 인터넷과 제작기계의 발달 등을 메이커 문화의 원인으로 꼽으면서 “미국은 제조산업의 혁신, 제조업 리더십의 복원을 위해 팹랩과 제작자문화에 주목하면서 제작교육과 제작공방에 엄청난 지원을 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메이커들의 활동 공간인 팹랩, 메이커 스페이스, 제작공방은 국내에서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국내 메이커 스페이스는 2017년 기준으로 126개에 이른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22년까지 메이커 스페이스를 367개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팹시티를 선언한 서울시는 우선 서울혁신파크를 팹시티의 기지로 만들어 에너지 제로, 도시농업 등 다양한 사회실험들을 진행할 예정이다. 서울혁신파크에는 220여개 단체들이 입주해 있고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이 운영되고 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