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대개 뚜렷한 자각 없이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 실수의 대가로 인생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간혹 있다. 소설가 편혜영(47)의 신작 소설집 ‘소년이로’(문학과지성사)는 그 불안한 시간을 서늘하게 담는다. 작가는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가진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자기 기만에 능숙하고 가차 없이 속물적인 인물의 몰락 서사에 늘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소설집에는 미국 뉴요커에 게재된 ‘식물 애호’와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소년이로’ 등 지난 6년간 쓴 단편 8편이 수록됐다. 출간한 지 열흘 정도 지났는데 벌써 3쇄를 찍었다. 그는 지난해 ‘식물 애호’를 늘려 쓴 소설 ‘홀’(The Hole)로 셜리 잭슨상을 수상했다. ‘식물 애호’의 주인공 오기는 어느 날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고 장모의 간병을 받는다.
‘잔디’ 속 남편은 임시 교사에게 위해를 가하고 정직 처분을 받는다. 남편은 잔디를 망친 제초제 제조사를 상대로 사과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원더박스’의 수만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건을 피하려다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친다. 병상에 누운 그는 “도대체 누구 잘못이냐”고 계속 캐묻는다. ‘월요일의 한담’에 나오는 유는 원치 않게 가족과 헤어진다. 이들의 실패는 누구 탓인가.
작가는 “잘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몰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끌린다. 그들에 대한 연민도 있다. 나 자신도 그런 속물이고”라고 했다. ‘식물 애호’의 오기는 아내를 방치했고 아내와 그 어머니의 원한을 산다. 오래전 자기 인생에 구멍이 나고 있었지만 주목하지 않았고, 그 구멍이 자신을 삼키리라는 공포에 떤다.
작가는 얼마 전 미국 UC버클리에서 열린 한국문학 번역 워크숍에서 한 외국인 독자에게 오기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왜 주인공 오기는 자기 이름이 있는데 아내와 장모에겐 이름이 없는가?” 작가는 “각 인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기를 중심으로 한 관계가 작품에서 핵심이기 때문에 오기에게만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잔디’의 남편은 자신이 왜 제초제 회사에 항의를 하는지, 아내인 ‘나’는 왜 그 교사를 찾아가 사과를 받아내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작가는 “진실이란 손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숨겨져 있거나 모습을 달리해서 대뜸 알아차리기 힘들다. 물론 그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조차 한참 들여다봐야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소설에서 진실은 삶의 표면 뒤에 감추어져 있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미국에 번역 출간된 ‘홀’이나 ‘재와 빨강’도 그런 전개다. 한국형 서스펜스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소설은 영어권에서 각광받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두려움과 불안은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다. 내 소설은 배경지식이 없어도 서스펜스를 경험하며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어서 많이 읽히는 것 같다”고 했다.
작가의 소설에는 순응적인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병석에 누워있는 사람이나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 “그간 발표한 소설을 묶고 보니 거동하기 힘든 지경으로 아픈 사람이 많이 나와서 나도 궁금해하는 중이다(웃음). 무기력한 캐릭터가 원래 많이 나오는데 예전에는 회사원 형태였다면, 이번엔 환자와 간병인으로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소년이로’에는 공장을 운영했으나 이젠 병석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유준 아버지가 나온다. 오기(‘식물 애호’)도, 수만(‘원더박스’)도, 아버지(‘월요일의 한담’)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환자를 돌보는 이는 주로 아내나 그 자녀다. 간병인들은 이 상황이 지긋지긋하다. 아픈 사람과 그 사람을 간병하는 이들의 성별이 남녀라는 점에서 가부장에 대한 반발이 느껴진다.
“무의식적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가부장인 남성의 투병으로 여성이 저임금 노동에 내몰리면서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여성 인물이 아픈 사람으로 등장했다면 아마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여성 인물이 아플 땐 작가인 내가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기 힘들기 때문에 남성으로 그려낸 부분도 있다”고 했다.
그의 서사는 대체로 몰락과 파멸로 향한다. 낭만적인 연애를 소재로 생각해본 적은 없을까. “일단 내가 그런 이야기에 재미를 못 느낀다. 가끔 단편 ‘저녁의 구애’가 연애 소설이라고 우기긴 한다”며 웃었다. ‘저녁의 구애’는 장례식장에서 갑자기 구애 전화를 거는 한 남성의 불안하고 황폐한 내면을 그린 작품이다.
‘소년이로’에 수록할 소설을 고르고 매만지며 이번 봄을 보낸 그는 “이 책과 함께 푸른 봄을 맞아 기쁘다”고 했다. 올해 단편 두어 편을 더 쓴 뒤 내년에 새 장편을 시작할 예정이다. 2000년 등단한 작가는 소설집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와 장편소설 ‘선의 법칙’ 등을 출간했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