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갖게 된 2인의 유림, 안동 만세운동의 불길을 일으키다

입력 2019-05-09 00:04

터널을 지나자 고즈넉한 한옥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문을 지날 때는 앞에 놓인 철길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열차 소리에 땅이 흔들렸지만 세워진 지 100년이 넘은 처마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등 국가유공자 9명이 자란 임청각(보물 182호)의 풍경이다.

첫 만세 부른 이상동 조사와 안동교회

임청각에서 태어난 9명의 독립운동가 중에는 기독인도 있다. 석주 선생의 동생인 이상동(1865~1951) 조사다. 을미의병 당시 신돌석 부대에서 활동했던 이 조사는 1911년 기독교인이 된 뒤 머슴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자유롭게 한 뒤 기독교 교육을 했다.

1919년 3·1운동의 불길은 안동으로도 번졌다.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갖고 내려온 유학생 김재명과 안동교회 성도들이 교회에서 태극기와 선언문을 복사해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하지만 거사 하루 전인 3월 12일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고 만다.

모두가 만세 운동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13일 오후 이 조사가 안동읍내 한복판에 나타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얀 연을 날리며 만세를 외치던 이 조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서로 향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민족은 10일이 지나지 않아 독립할 것”이라고 외쳤다.

이 조사의 외침은 지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8일 안동교회 성도들과 유림 등 2500여명이 만세운동을 시작했고 23일에는 3000여명이 만세를 불렀다. 지난 3일 안동교회에서 만난 김승학 목사는 “100년 전 만세운동의 주역 중 한 축은 한국교회와 성도들이었다”며 “유림이 주류였던 안동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안동교회에는 이 조사 외에도 땅을 팔아 만세운동을 지원한 조춘백 성도 등 7명의 독립운동가가 더 있다.

옥중에서 만난 복음

일제는 안동 지역 만세 운동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일경의 발포로 3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다쳤다. 많은 사람이 투옥됐다. 이 조사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하지만 안동의 3·1운동은 한국교회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수감된 이 조사는 당시 유림이었던 봉경 이원영(1886~1958) 선생을 만난다. 유림이었던 그도 만세를 부르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다.

봉경 선생은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뿌리 깊은 유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생인 만큼 한문에 능통했지만, 신문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시인 이육사가 다닌 학교로 알려진 봉성측량교습소와 보문의숙의 첫 졸업생이기도 했다. 그는 이 조사를 통해 복음을 접한 뒤 신앙을 갖기로 결심했다. 출소 후인 1921년 안동 예안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됐다.

이 목사는 1932년 안동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당시는 일제가 본격적으로 내선일체를 강요하던 때다. 일제는 일본어를 제1언어로 가르치는 것을 골자로 한 조선교육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 목사는 “아이들이 민족정기를 잃게 할 수 없다”며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교편을 잡았다. 성도들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모두 거부했다. 일제는 이 목사를 4차례 투옥했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장로교단은 이 목사를 면직했다. 그의 투쟁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해방 후에는 장로교의 분열을 막는 데 힘썼다. 1954년 총회장이 돼 교단 분열을 막는 데 주력했다. 교단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기독교인 문제를 놓고 고심할 때에는 “그들이 있어 교회를 지킬 수 있었다”고용서하며 ‘신사참배취소성명’을 발표했다. 1958년 별세한 후 정부는 이 목사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1999년 유해를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독립운동 되새기는 안동 기독교인들

경북 안동은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관측에도 불구하고 이상동 조사와 이원영 목사 등 많은 기독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사진은 안동교회 교회역사해설사인 임만조 원로장로와 권정국 장로가 교회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안동교회 제공

안동교회는 지난해부터 교인 20여명이 ‘교회 역사 해설사’가 됐다. 안동교회의 역사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기독교인들이 찾아오면서부터다. 3일 교회에서 만난 임만조(79) 원로장로와 권정국(78) 장로는 교회의 대소사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인쇄소를 운영하며 절판된 책들을 복사해 보관하고 있다는 권 장로는 “이상동 조사와 같은 신앙 선배를 둔 것은 영광”이라면서 “우리가 그의 삶과 신앙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4일 한국기독교사적으로 지정된 ‘이원영 목사 생가 비’ 제막식 사진. 안동서부교회 제공

지난달 안동 목회자들은 이원영 목사의 생가인 ‘사은구장’을 보존하기 위해 나섰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사은구장을 기독교유적지로 지정했다. 이들은 생가를 고친 뒤 ‘봉경 이원영 목사 기념관’으로 단장할 예정이다. 이정우 안동서부교회 목사는 “이원영 목사는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분”이라면서 “이 목사의 선비 정신과 복음으로 당당한 모습은 곧 3·1운동 정신과도 연결된다”고 말했다.

안동=글·사진 황윤태 기자 trul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