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술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사진) 터키 대통령이 독재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터키 최고선거위원회(YSK)는 최근 야당의 승리로 끝난 이스탄불 시장 선거 결과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결정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도시다. YSK가 에르도안 행정부와 집권 정의개발당(AKP)의 압박에 굴복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YSK는 지난 3월 치러진 선거에서 개표감시위원을 공무원 중에서 선정토록 한 선거 관계 법령을 위반한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며 재선거를 결정했다고 터키 국영 테레테(TRT)방송이 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스탄불 지역 재선거는 다음 달 23일 열릴 예정이다.
YSK의 결정에 따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은 시장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3월 투표가 끝난 후에도 재검표 작업을 거치느라 지난달 17일에야 당선이 확정됐었다. 그런데 에르도안 정부는 선거 직후부터 무효를 주장하며 YSK를 강하게 압박했다. 터키 검찰과 경찰은 투·개표 감시위원 100여명을 소환조사해 공포감을 조성했다. 터키 검찰은 소환한 투표소 직원 100여명 중 43명이 2016년 쿠데타 모의 배후로 지목된 펫훌라흐 귈렌과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결국 YSK는 당선증 발부 20여일 만에 선거 결과를 뒤집었다.
이마모을루가 소속된 터키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은 YSK의 결정에 즉각 반발했다. 오누르살 아드귀젤 CHP 부대표는 소셜미디어에 “(이번 결정은) AKP가 지면 불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민의를 거스르는 체제는 민주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다”고 썼다.
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재투표 결정에 반대해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베식타스, 카드쿄이, 시실리 지역 시민들도 거리에서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며 시위를 벌였다.
카티 피리 유럽의회 터키담당 조사관은 소셜미디어에 “터키에서 선거를 통한 민주적 정권 이양에 대한 믿음을 끝장냈다”고 썼다. 리라화는 선거일 기준 10% 이상 폭락했다. 티머시 애시 블루베이자산운용 신흥시장 전략가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터키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인식을 훼손하고 있다”며 “터키 경제를 취약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치신인이던 199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승리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정치기반을 쌓았다. 2017년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하고 처음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도 이스탄불 사수에 공을 들였다. 그러면서 거물 비날리 이올드름 전 총리를 출마시켰지만 불과 득표율 0.2% 포인트 1만4000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