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가 ‘한 나라 두 대통령’ 사태로 야권 지도자의 군사 봉기가 일어나는 등 극심한 혼란에 빠진 베네수엘라에서 치열한 대리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상대국을 서로 비난하면서 베네수엘라에 대한 과도한 간섭을 멈추라고 촉구했다. 양국이 베네수엘라 사태를 놓고 충돌 직전까지 간 상황이다. 두 강대국이 내정간섭 비판을 무릅쓰고 베네수엘라 사태에 앞다퉈 개입하는 이유는 결국 ‘석유 이권’을 선점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1일(현지시간)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미국은 필요하다면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작전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같은 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의 통화에선 “러시아와 쿠바의 개입은 베네수엘라 정국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미·러 관계를 뒤흔들고 있다”고 날선 비판을 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 사태에 계속 개입하겠다고 강조하고, 러시아의 간섭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러시아도 지지 않고 미국을 비난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성명에서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은 심각한 국제법 위반”이라며 “(미국의) 공격적 행보는 가장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로지 베네수엘라 국민만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임시대통령을 자처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의 후원자 미국과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지지하는 러시아가 베네수엘라를 무대로 영향력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불꽃튀는 대리전에는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을 차지하려는 두 강대국의 속내가 담겨 있다. 사회주의, 반(反)서구를 표방하는 마두로 정권과 줄곧 대립각을 세웠던 미국은 과이도 의장이 이끄는 친미 정권이 들어서야 베네수엘라에 미국의 석유기업들을 이전보다 쉽게 진출시킬 수 있다. 중남미 국가들을 ‘뒷마당’으로 여겨온 미국이 러시아에 영역권을 내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다. 최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남미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반대하는 외교 전통인 ‘먼로주의’의 부활을 선언하기도 했다.
러시아에도 베네수엘라는 포기할 수 없는 원유 공급처다. 러시아는 지난 10년간 베네수엘라에 구제금융을 지급한 대가로 베네수엘라의 유전 5곳 중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러시아는 30년 동안 사용할 수 있을 양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는 카리브해 지역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는 미국 제재를 피해 베네수엘라에 원유 대금 200억 달러(약 23조원)를 선지급하기도 했다. 만약 마두로 정권이 퇴진하면 베네수엘라 원유 확보를 위한 러시아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다.
미국 조야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베네수엘라 사태 초기 오판을 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백악관 참모들은 과이도 의장의 군사 봉기가 대규모 시위로 이어져 정권교체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정작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마두로 대통령을 끌어내릴 의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행정부는 마두로 반대세력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네수엘라 사태의 중대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됐던 1일 카라카스에 모인 반정부 시위대는 수천명에 그쳤고, 과이도 편에 선 군인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날 역대 최대 반정부 시위를 벌이겠다는 과이도 의장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과이도의 정치적 스승 레오폴도 로페스는 카라카스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번 시위로 총 2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다치는 등 유혈 충돌이 빚어지자 브라질 국경을 넘는 베네수엘라 국민이 이전보다 3배 이상 늘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조민아 기자 mina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