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조민영] 검찰에 칼 쥐어주는 정치

입력 2019-05-03 04:03

법을 좀 안다는 사람일수록 “법대로 하자”는 말은 피하라고들 한다. 법원·검찰과 변호사 사무실들이 모여 있어 법조타운이라고 불리는 서초동은 “민사든 형사든 안 가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도 상식으로 통한다. 법 없이 해결되지 않는 일이 ‘법대로’ 한다고 풀리는 경우도 없거니와 ‘법대로’ 하다가 더 큰 손해를 입기 쉽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같은 이론과 달리 현실에선 온갖 사건이 법원과 검찰로 몰려든다. ‘고소·고발 천국’이라는 오명을 가진 사회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갈등을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그런데 이 오명의 정점을 국회가 찍고 있다. 여야 4당이 자유한국당과 극한 대치 끝에 선거제와 개혁법안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생긴 갈등은 ‘법대로’의 길을 따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26, 29일 1, 2차에 걸쳐 국회선진화법 위반으로 고발한 자유한국당 의원만 29명에 달하고, 정의당도 한국당 의원 40명을 고발했다. 국회 의안과 앞에서 벌어졌던 몸싸움과 사무실 점거, 집기 파손을 비롯해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 및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회의장 봉쇄 등이 국회선진화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몸싸움이 일방은 아니었을 터다. 한국당도 맞고발에 나섰다. 한국당 의원과 보좌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공동상해 등 혐의로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를 포함, 17명의 민주당·정의당 의원 등을 고발했다. 이에 앞서 임이자 한국당 의원이 문희상 국회의장을 항의 방문하는 과정에서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며 문 의장을 상대로 낸 고소 건도 있다. 중복으로 고발된 이들을 제외하고 여야 의원 60명 이상이 고소·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검찰은 이번 사태에서 비롯된 집단적인 의원 고소·고발 건을 모두 여의도 국회 담당 지역인 서울남부지검에 배당했다. 남부지검은 단 며칠 사이에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 수십명을 수사하게 됐다.

국회선진화법은 법 취지를 살리고자 이를 위반해 벌금 500만원 이상 또는 집행유예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선출직 공무원에 출마할 수 없도록 피선거권을 박탈하게끔 엄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른바 ‘동물국회’에서 벌어진 행태를 법 규정에 비춰볼 때 재판에 넘겨지면 유죄로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법조계의 해석이다.

여의도 정치의 그간 관행으로 볼 때 여야 간 고발은 국회 정상화라는 명분을 위해 모종의 합의와 함께 취하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고소·고발이 있어야 수사할 수 있는 친고죄가 아니기 때문에 일단 입건된 이상 검찰은 수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현역 의원 수십 명이 대거 연루된 사안을 검찰이 일벌백계하듯 기소하긴 쉽지 않겠지만, 재판에 넘길지 말지는 일단 검찰 손에 맡겨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패스트트랙에 올린 개혁법안에는 검찰의 수사권을 제한하려는 검·경 수사권 조정안이 올라 있다. 검찰의 과도한 권한을 견제하자며 목소리 높인 정치가 스스로 칼자루를 검찰에 쥐어준 셈이다.

정치의 문제를 정치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의 힘을 빌린 것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전직 대법원장을 법정에 세운 ‘사법농단’ 사태가 가능했던 것도 우리 사회의 굵직한 현안 해결을 사법의 판단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사안을 해결할 정치권이 분쟁을 만들고 그 해결 방법을 사법기관에서 찾으면서 검찰을 개혁하고 사법부를 개혁하자는 목소리는 비웃음만 산다. 한 검찰 고위 관계자는 “검찰에 고소장 제출하고, 수사 잘하라고 하면 검찰의 힘을 빼는 건가, 힘을 싣는 건가. 검찰 개혁의 시대라지만 적폐청산 요구 덕에 여느 때보다 (검찰을) 찾는 이가 많았던 시대였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사법의 영역에 들어오는 순간 갈등은 조정되지 않고, 이기는 자와 지는 자를 나누는 방식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지는 쪽이 승복하지 않으면 또 다른 후유증을 낳는다.

조민영 사회부 차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