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아이는 부모가 셋이었다. 낳아준 부모의 이혼 후 친아버지 집과 친어머니 집을 오가며 살았다. 친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아이를 때렸다. 매질을 견디다 엄마 집에 가면 이번엔 의붓아버지가 성추행을 했다. 아홉 살 때 친아버지를 떠나 엄마에게 보내질 때도, 열한 살 때 의붓아버지 손에서 벗어나 다시 친아버지에게 넘겨질 때도 아동보호기관을 거쳐서 오갔지만, 아이가 받아든 결과는 폭행과 성추행 사이의 핑퐁일 뿐이었다. 지난달 성적 학대가 드러나게 되자 의붓아버지는 아이를 불러내 살해하고 시신을 저수지에 버렸다. 그 현장에 엄마가 있었다. 오히려 살인을 돕고 유기를 방조했다. 광주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A양은 고통스럽기만 했던 12년의 짧은 생을 그렇게 마감했다. 아버지 어머니라 불렀던 세 어른은 학대와 살인의 가해자였고, 경찰도 아동기관도 지켜주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어린 생명을 온전히 키우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실패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치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친부 친모 계부라는 세 어른은 부모의 자격이 없었다. 보살펴야 할 어린 딸을 지속적으로 학대했고, 끔찍하게 살해한 범행은 사전에 계획돼 있었다. 그런 인면수심의 몇몇이 저지른 일로 사건을 규정한다면 이 사회가 공동체임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제대로 보살핌을 받으며 안전하게 자라야 한다. 그래서 아동인권을 선언하고 아동학대 예방제도를 갖추는 것이다. A양의 비극적 삶과 처참한 죽음을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후속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아이를 지켜낼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법원이 폭행하는 친아버지에게 접근금지명령을 내렸을 때, 의붓아버지가 버리다시피 아동보호기관에 다시 보냈을 때 보호의 손길이 미쳤어야 했다. 생전에 당했던 학대를 친지들이 속속 증언하고 나서는 상황은 거꾸로 아이의 문제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알면서 막지 못한 이유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학교에도 잘 안 보냈다니 결석생을 방치했는지 살펴봐야 하고, 주변의 대응은 어땠는지도 들여다봐야 한다. 아이의 생애를 재구성해보는 사회적 부검이 필요하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 아이들을 지켜낼 방법이 그 결과물에 들어 있을 것이다.
[사설] 부모에게 살해된 12살 아이… 사회적 부검이 필요하다
입력 2019-05-03 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