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골프 경력이 언젠가 타이거 우즈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했다. 그렇지만 10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운동 골프를 생각하면, 성 추문으로 가정은 깨졌고, 명예는 실추됐으며, 허리와 목은 수차례 수술해야 했고, 사람들의 신뢰도 무너졌다. 40대 중반의 우즈도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을지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옛 그 우즈를 더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그런데 우즈가 신화같이 나타나 2019년 마스터스의 우승을 이룬 것이다. 사람들은 전례 없던 환호를 보냈으며, 중계하던 TV 방송사는 몇 분 동안 침묵의 방송을 내보내야 했을 정도로, ‘타이거의 부활’을 감격했다. 죽었던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골프황제 타이틀을 탈환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고뇌와 아픔 그리고 각고의 노력이 없었다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순간 다윗의 범죄와 그의 참회의 기도 시편 51편이 그리고 죽어가는 한국교회가 떠올랐다.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스캔들 때문이기도 하고, 꿈이 없어 방자하게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복음의 본질을 놓쳤기 때문이기도 하며, 허랑방탕히 번영신학에 온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화려한 예배당이 서점과 카페로 변하는 서구교회들처럼 될 거라 예측하기도 한다. 솔직히 서구의 신학을 그대로 가르친 신학교육이 아니었던가. 같은 종자에서 같은 열매를 거두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교회는 서구교회보다 한술 더 뜬다. 상위 5% 초대형 교회들이 전체 교인의 90%를 가지고 있다. 수평 이동으로 인한 쏠림현상이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초대형 교회들은 교단과 신학교를 좌지우지하며 비성경적 힘의 논리를 펴고 있다.
젊은이들이 대형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들이 ‘소확행’을 추구하며 작은 교회로 이동하면 좋으련만, 아예 교회 문을 박차며 나가고 있다.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있다. 농어촌 지역에는 주일학교 없는 교회가 90%에 이르고 있다. 어린이와 젊은이가 없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출산율은 세계 꼴찌로 가장 앞서 사라질 나라가 한국이다. 일부 목사와 장로들의 부도덕과 부정부패가 세상에 자주 알려지면서 교회 부흥이 멈추고 있다. 교회의 부끄러운 정보들이 어쩌다 알려지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도 많아 교인들은 할 말을 잃은 채 지쳐 있다. 그들의 헌신, 희생, 봉사도 옛말이 되어가고, 그들에게 기쁜 헌금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한국교회는 너나없이 긴축재정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번영신학이 거둔 아이러니한 자업자득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어쩔 수 없이 청빈해야 한다. 허우대만 키웠던 거품을 제거하고 진실해야 한다. 100여년 전 한반도에는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선교사들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직시하였다. 그들은 할 일을 찾아 실천했다. 먼저 예수 십자가의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복음을 근거로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이었다. 선교사들은 의료사업, 교육사업, 한글 보급, 청년운동, 여성운동, 신분제 철폐 등에 앞장섰다. 이는 복음이 요청하는 일이었다. 혁명적인 일로서 한반도를 새롭게 했고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른다. 그리스도 안의 새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복음전파를 위한 곁다리 수준의 일은 결코 아니었다. 예배당에 갇힌 채 세상과는 담을 쌓은 이원론적 중세교회의 자기 왕국신앙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신앙의 실체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알도록 했다. 사람들은 신앙은 보이지 않지만(invisible), 확실히 그 신앙은 보이는(visible) 것임을 인식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사람이 되고, 옛 삶을 청산하며, 놀라운 새 삶이 시작되는 것임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 교회로 발걸음을 돌렸으며, 자식들이 교회에 나가길 바랐다. 그리고 교회는 부흥했다.
주도홍 백석대 전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