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홍인혜] 여린 듯 강인한, 고요한 듯 웅장한

입력 2019-05-03 04:02

작년 가을의 일이다. 삶이 부유하는 기분이 들어 뿌리를 갖고 싶었다. 인생이 잿빛으로 느껴져 녹음을 더하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화분 하나를 들였다. 허리께 오는 키에 자그마한 잎사귀들이 빼곡한 녹보수 나무였다. 식물이 하나 들어오자 집에 대번에 생기가 더해졌다. 작은 나무 한 그루는 그 어떤 조명보다 또렷한 빛을 발했다. 생명만이 뿜어낼 수 있는 모종의 찬란함이었다.

사실 나는 살며 많은 화초를 사지로 몰아 왔다. 애플민트, 로즈마리 같은 작은 허브 화분 여럿을 노랗게 말려 죽였다. 키우기 쉽다기에 업어온 다육식물도 우리 집에선 괴상하리만치 나날이 물러지더니 덜컥 죽어버렸다. 사막을 견디는 선인장마저 어느 날 보니 뿌리째 흙에서 빠져 나와 모로 누워 있었다.

키우던 식물의 생명이 사위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영 개운치 않은 경험이다. 동물의 경우 맥이 끊어진다거나, 호흡이 멎는다거나 하는 명징한 죽음의 순간이 있는데 식물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온 줄기가 메말라도 이 친구가 완전히 죽었는지, 덜 죽었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죽음의 기운이 너무 강렬해져 미관상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눈을 질끈 감고 화분을 처분해야 한다. 더는 대지를 쥐지 못하는 마른 뿌리를 뽑아내고 흙을 세상에 흩어낸 뒤 빈 화분을 버려야 한다. 한때 생기가 돌았던 몸을 쓰레기로 처분하는 이 과정은 마치 설화 속에서나 듣던 ‘고려장’ 같은 기분을 맛보게 했다.

그렇기에 나는 새 화분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제때 물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영양제까지 사서 꽂아두었다. 스스로의 호흡조차 챙기지 않았거늘 오직 화분을 위해 환기도 자주 하고, 온몸 고루 빛을 받도록 화분을 수시로 돌려주곤 했다. 하지만 복병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 집에 벌레 떼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거실에 빵 부스러기라도 흘린 날엔 놈들의 페스티벌이 열렸다. 놀라 찾아보니 그들은 ‘유령개미’라 불리는 해충이었고 본거지는 분명 화분 속이었다. 유령개미는 여왕이 여럿이라 박멸도 어렵다는 흉흉한 정보까지 들려왔다.

개미는 시작에 불과했다. 수소문해 구한 강력한 약품에 녀석들의 기세는 주춤해졌는데 개미가 사라지자 진딧물이 들끓기 시작했다. 화분에 다가가면 미세한 존재들이 바글대는 것이 느껴졌다. 목초액이니 뭐니 방충에 좋다는 것을 뿌려 녀석들을 다스리던 차, 녹보수의 잎사귀에 까만 점박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은 잎에 붙어살며 진액을 뿜는 개각충이라는 벌레였다. 3차 재앙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자 난 내가 사 온 것이 화분인지 하나의 생태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벌레들의 몸살을 겪는 와중 겨울이 찾아왔다. 무성했던 녹보수는 잎사귀를 하염없이 흘리기 시작했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바닥에 쌓인 이파리들을 치우는 게 일이었다.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했던 녹음은 어느새 듬성해지기 시작했고 이러다 빈 가지만 남을 날이 멀지 않아 보였다. 죽어가는 생명을 바라보는 심정은 서글펐다. 온몸에 벌레가 들끓어도, 그 어떤 나무도 1㎝도 도망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을 삼키는 고통의 복판에 있어도, 그 어떤 식물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녹보수는 고요히 죽어가고 있었다. 물을 주고, 약을 치고, 잎사귀를 닦아줘도 다가올 운명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피할 수도 없이 그것이 찾아왔다. 만물에 공평하게 다가오는 그것, 때가 되면 숙명처럼 마주하는 그것, 생명의 시계를 관장하는 그것.

그것은 봄이었다. 화분은 봄의 영토였다. 봄 햇살의 나른한 손가락이 녹보수를 어루만졌다. 며칠 전 습관적으로 녹보수를 살피니 희미한 연두가 보였다. 나무의 마디마다 새순이 돋아나 있었다. 겨우내 떨어뜨린 넓고 튼튼한 녹색 잎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여린 아기 잎사귀였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더듬어보니 그것은 보드랍고 촉촉했다.

이 사건은 내 조그만 집에서 벌어진 미세한 경이였다. 이 무던한 생명체는 사실 세상 누구보다 빠르게 계절을 감지하고 있었다. 물기라곤 없어 보였던 마른 몸체는 윤택한 생명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새끼손톱만 한 이 연한 싹들이 그 무엇보다 충실한 증거이고 또렷한 웅변이었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