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반복적 위협’ 신고했더니… 경찰 “누가 맞지 않는 한 해줄 거 없어”

입력 2019-05-01 18:48 수정 2019-05-01 21:13

조현병 환자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주민에게 흉기를 휘두른 ‘안인득 사건’. 이를 계기로 민갑룡 경찰청장이 반복적 위협 신고 집중 점검을 지시했지만 현장에선 실질적 조처 없는 시늉내기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위협을 호소한 시민에게 현장 출동 경찰관은 인권 문제 등을 거론하며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는 등 소극적 대처로 일관하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자에 의한 범죄가 이슈가 될 때마다 땜질식 대응만 이뤄진 탓에 치안 행정에 혼란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거주하는 A씨는 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조현병이 의심되는 이웃에게 여러 차례 시달려 신고를 했고, 점검차 나온 경찰관에게 정신건강복지센터 연계 등 조치를 요구했지만 ‘범죄가 확인되지 않으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관은 (해당 이웃의) 보호자에게도 본인이 연락해보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토로했다.

A씨는 지난 2월부터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주민 B씨의 해코지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B씨는 ‘A씨가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한다’며 인근 파출소에 A씨를 신고했고, 집에 찾아와 현관문을 잡고 항의하기도 했다. 이후 A씨 집 앞 화단에 각종 물건이 투척되기 시작했다. 유리병과 유리잔 파편이 화단에 널려 있는 일도 있었다. A씨는 지난 22일 오전 B씨 이름이 적힌 우편물들이 화단에 던져져 있는 걸 보고 경찰에 B씨를 신고했다. A씨는 그러나 “파출소 경찰관으로부터 ‘현행법상 정신질환이 의심돼도 누가 맞지 않는 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해당 경찰관은 다만 “신고가 누적돼 담당 형사가 배정될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A씨는 신고 당일 오후 집 현관문에 빨간색 마커로 ‘XXX’ 표시가 돼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B씨를 신고했다.

민 청장의 집중 점검 지시가 내려진 뒤인 지난 28일 경찰서 담당 형사가 A씨를 방문했다. A씨는 형사에게 그간의 문제를 호소한 뒤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정신감정을 의뢰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형사는 “조현병이 많이 문제지만 그런 심각한 병도 자신이 거부하면 조치할 수 없다”고 말했다. A씨가 “B씨 보호자에게 연락이라도 해 달라”고 하자 형사는 “본인이 전화해보라. 우리도 전화는 해보겠지만 범죄가 안 되면 경찰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형사는 A씨에게 “증거가 없어 죄가 성립하지 않아 사건을 종결하겠다”며 “CCTV를 설치하라”는 말도 했다. 형사가 방문한 다음날에도 A씨 현관문 앞에는 빨간색 X자가 다시 그어졌다.

지난해 11월 경찰청이 마련한 ‘정신과적 응급상황에서의 현장대응 안내’엔 경찰이 자·타에 해를 가할 우려가 있는 사람의 정신과적 평가가 필요할 경우 정신건강복지센터에 협조를 요청하도록 돼 있다. 이 경우 정신건강전문요원이 가정방문·응급출동을 할 수 있고, 고위험자는 경찰과 의사 동의하에 3일간 응급입원을 시킬 수도 있다.

B씨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른 주민들로부터도 오래 지속돼 왔다고 한다. 빌라 경비원은 “주민들이 B씨에 대한 민원을 제기했고 2층 주민은 자꾸 유리병이 투척돼 이사까지 갔다”고 말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집 문 앞에 깨진 유리잔이 놓여 있거나 왕소금이 뿌려져 있는 일이 반복됐다.

B씨가 창문을 열고 이웃집 대문에 고함을 지르거나 새벽에 호루라기를 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파출소 관계자도 “여러 가구에서 무섭다고 신고가 들어와 B씨에게 얘기했는데도 가족들에 의한 조치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국민일보 취재가 시작되자 지난 30일 문제 확인에 나섰다. 이날 경찰을 만난 주민 C씨는 “갑자기 강력팀장이 와서 그동안의 일을 애기했는데 ‘무슨 일 있으면 112에 신고하라’고만 했다”며 “안인득 사건 이후 매일 불안해 이사를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이에 경찰 관계자는 “담당 형사는 센터 연계를 거부하지 않았다고 한다”며 “강력팀장을 보내 여론을 들었고, 응급입원 상황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전문가들은 경찰의 대응 매뉴얼 자체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해를 가할 여지가 충분하지 않는 한 매뉴얼은 재량사항이어서 경찰이 인권침해 비난을 피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라며 “이런 사각지대를 메우려면 책임 문제를 해결하는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정철우 경찰대 경찰학과 교수도 “정신질환 의심 인물에 대한 경찰 처분의 근거를 법제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