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은 북한 아닌 韓기업의 성장 정체

입력 2019-05-02 04:01
사진=뉴시스

코스피의 주가 수준이 청산가치 밑으로 추락했다. 코스피시장의 시가총액 합계가 상장기업의 자본총계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주식이 저평가됐다. 지난해 하반기 하락장을 계기로 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한 각종 ‘처방전’이 쏟아졌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은 되레 심화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골손님’인 지정학적 리스크 너머를 바라본다. 단순히 남북 관계, 한반도 안보 불안만으로 한국 증시가 저평가를 받는 건 아니라는 진단이다.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것은 한국 기업의 정체된 성장세다. 국내 증시가 ‘저성장의 굴레’에 빠진 사이 투자자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코스피 상장사들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년 전(1.14배)보다 낮아진 0.95배로 산출됐다고 1일 밝혔다. PBR은 주가를 주당순자산가치로 나눈 비율이다. 1배를 ‘저평가’의 기준점으로 본다. 1배 미만이라는 것은 주가가 주식의 순자산가치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거래소는 지난해 결산 재무제표와 지난달 29일 종가 기준 시가총액을 반영해 PBR을 계산했다.

코스피시장의 주가수익비율(PER)도 하락했다. 기업의 이익 대비 주가 수준을 보여주는 PER은 지난달 말 11.5배로 1년 전보다 0.5배 낮아졌다. 상장사의 이익 감소폭보다 주가 낙폭이 더 컸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코스피 상장사 이익규모는 122조원으로 전년 대비 약 8% 감소했지만, 시가총액은 13% 떨어졌다. 매도세가 과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국 증시 저평가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더 두드러진다. 코스피 대표 종목으로 구성된 코스피200의 PER은 10.0배로 선진국인 미국(20.2배) 일본(12.8배)은 물론 신흥국인 중국(13.7배) 인도(23.9배)보다 낮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지수(MSCI) 기준 선진 23개국 평균(17.8배)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코스피200의 PBR도 1.0배로 신흥 24개국 평균(1.6배)보다 낮은 최하위권이다.

기업의 배당을 놓고봐도 저평가는 여전하다. ‘짠물 배당’은 한국 증시의 매력을 낮추는 요인 중 하나로 꼽혀왔다. 이에 따라 금융 당국과 기업들은 지난해 배당 확대에 주력했다. 지난달 말 코스피200의 평균 배당수익률은 2.2%로 증가했다. 미국(2%)과 중국(2.1%) 등 주요국의 평균 배당수익률과 유사하다.

그런데도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의 성장성을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내 증시에서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믿고 길게 투자할 만한 기업이 많지 않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 환경과 관련해서 기업들의 미래수익이 약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반영되면서 한국 증시 저평가 현상이 더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완화되는 국면에서도 증시가 과도하게 추락했던 지난해 하반기의 ‘패닉장’은 이런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전통적으로 한국 증시 저평가 요인으로 지목되는 기업 지배구조 문제를 개선하는 데도 증시에 활력이 돌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 교수는 “지배구조 문제가 개선되고 있음에도 산업 경쟁력이 떨어지는 점, 노사관계의 위험 등으로 기업 미래수익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진 점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유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증시가 침체되자 국내 투자자들은 해외로 발길을 돌린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해외펀드 투자액은 149조5000억원으로 2014년(86조8000억원) 대비 138.4%나 증가했다. 해외주식 직구(직접구매) 열풍도 거세다. 올해 1분기 국내 투자자의 외화증권 결제금액은 378억9000만 달러로 전 분기보다 50.6% 늘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