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일왕 “세계 평화 희망”… 평화 강조한 부친의 길 이어갈 듯

입력 2019-05-01 18:58 수정 2019-05-01 21:15
나루히토 새 일왕이 1일 도쿄의 고쿄(왕궁) 내 영빈관에서 즉위식에 이어 열린 조현의식에서 첫 소감을 밝히고 있다. 그는 세계 평화를 기원했지만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현행 일본 헌법에 대한 수호 의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오른쪽은 마사코 왕비. 왕비는 즉위식엔 참석하지 못했지만 일왕이 국민을 대표하는 각료를 만나는 조현의식에는 참석했다. 일본에선 이날 나루히토 일왕 즉위와 함께 ‘레이와(令和)’ 시대가 열렸다. AP뉴시스

나루히토(德仁·59) 새 일왕이 1일 즉위하면서 “세계 평화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밝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등 우익세력이 개헌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일본 헌법에 대한 수호 의지를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생 평화를 강조했던 부친 아키히토(明仁) 전 일왕의 길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완곡하게나마 호헌 입장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나루히토 일왕은 오전 도쿄의 고쿄(皇居·왕궁) 내 마쓰노마(영빈관)에서 즉위식을 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어 국민을 대표하는 각료 등을 만나는 ‘조현의식’을 진행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상왕의 행보를 깊이 생각해 항상 국민을 생각하면서 헌법에 따라 일본과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것을 다짐한다”면서 “국민 행복과 국가 발전, 세계 평화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또 “헌법 및 왕실전범 특례법에 따라 왕위를 승계했다”고 한 뒤 퇴위한 부친 아키히토 전 일왕에 대해선 “즉위 후 30년 이상 세계 평화와 국민 행복을 바라며 국민과 고락을 함께했다”고 평가했다.

나루히토(오른쪽 두 번째) 새 일왕과 마사코(오른쪽) 왕비가 1일 도쿄 왕궁인 고쿄에서 열린 조현의식에서 아베 신조(왼쪽) 일본 총리의 답사를 듣고 있다. 조현의식에는 왕실 가족과 내각 각료,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AP뉴시스

아키히토 전 일왕은 재위 기간 동안 일본의 침략전쟁 및 과거사에 대해 사죄와 반성의 뜻을 수차례 피력하는 등 평화주의 행보를 걸어왔다. 1989년 1월 즉위사에서 “여러분과 함께 헌법을 지키고 책무를 다할 것을 서약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아들인 나루히토 일왕이 첫 메시지로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주목됐다. 일본 언론들은 이날 나루히토 일왕이 기본적으로는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평가하고 “향후 그 위에 자신만의 색깔을 어떻게 입혀갈지가 관심”이라고 했다. 국민을 대표해 새 일왕 즉위에 축의를 표한 아베 총리는 “우리는 폐하를 국가 및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추앙하며, 평화롭고 희망찬 시대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나루히토 일왕에게 축전을 보내 “퇴위한 아키히토 천황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면서 평화를 위한 굳건한 행보를 이어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고 외교부가 전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나루히토 천황이 한·일 관계의 우호적 발전을 위해 큰 관심과 애정을 가져줄 것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일본 언론은 문 대통령이 그동안 한국에서 사용되는 ‘일왕’ 대신 ‘천황’ 호칭을 선택한 데 대해 “한·일 관계 개선을 바란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문희상 국회의장도 새 일왕에게 축전을 보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일본 내에선 여성의 왕위 계승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일본의 왕실 전범은 남성만 왕위 계승을 할 수 있다. 결혼한 공주는 아예 왕족 자격을 잃게 된다. 하지만 현재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남성 왕족이 새 일왕의 동생인 후미히토(53) 왕자, 조카인 히사이토(13) 왕자, 작은아버지 마사히토(83) 왕자뿐이어서 자칫 왕실이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특히 ‘왕위 계승 자격을 갖춘 성인 남성 왕족만 참석한다’는 전범 때문에 이날 일왕 즉위식에 마사코(雅子·56) 왕비가 불참한 것을 두고 시대착오적 규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 여론이 높아지는 것에 대해 “앞으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