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나도 감자가 더 맛있는데….” 시어머니께서 신바람이 나셨다. 이유는 손자가 ‘고구마는 달짝지근해서 싫다’며 감자에 간장을 찍어 먹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이다. “허허, 보통은 소금을 찍어 먹는데, 저 녀석이 나를 닮았구나. 난 간장만 찍어 먹잖니.” 시아버지도 곁에서 거드신다. 문득 흥미롭다는 생각을 한다. 삶은 감자를 먹고 있는 손자를 보며 신통하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다르면서도 닮았기 때문이다.
고구마는 손도 안대고 감자를 덥석 집는 것과 소금 대신 간장을 찍는 모습은 각각 다른 지점을 포착한 것이지만, 어르신들이 기쁜 이유는 같다. 나를 닮았다는 것! 하긴 아이를 낳았을 때부터 그러셨던 거 같다. 아이가 제 아빠 어렸을 때하고 닮았다고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런데 난 또 왜 그 말씀이 그리 섭섭했는지, 기어이 내 어린 시절 사진을 찾아내어 나 닮은 구석을 찾아내느라 애를 썼다. 하긴, 우리 집만 그러하랴. 신기한 일이다. ‘나와 닮은 것’이 그렇게 기쁜 일일까?
아이가 조금 자라니 이젠 그 ‘닮음’이라는 것이 역으로 아이에게 자기 평가의 기준이 되는 걸 발견했다. “엄마는 음악 듣는 거 싫어해? 나는 좋은데….” 핀잔을 준 것도 아니고, 집중해서 읽을거리가 있어 활짝 열린 아이 방문을 조심스레 닫은 것이 걸렸나 보다. 이내 슬그머니 나와서 엄마가 왜 자기처럼 음악을 즐기지 않는지, 아니 그 반대로 자기는 왜 ‘엄마랑 다르게’ 음악이 좋은지 내심 비교를 한다. 엄한 규율로 통제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자라면서 자주 엄마를 닮지 않은 자기 모습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나는 왜 엄마처럼 책이 재미있지 않지?” 하다못해 초저녁잠이 많은 나를 닮지 않은 자신의 올빼미 성향도 불편했나 보다. “나는 왜 엄마처럼 일찍 졸리지 않지?” 자라면서 점점 ‘엄마처럼’ 하려고 들고 닮는다는 것을 넘어 아예 ‘클론’이 되려고 하는 아이의 모습에, 행여 아이의 초자아로 군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엄마랑 닮지 않아도 여전히 예쁘고 소중하다’고, 아니 ‘너는 너다워야 더 멋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던 날들이 기억난다.
도대체 닮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왜 이토록 닮음으로 누군가를 편애하고 평가하게 되는 걸까? ‘이기적’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김으로써 영속성과 자기 확장을 꾀하는 법이니 나랑 닮은 부분을 기뻐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아닌가!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논리대로라면 이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비슷한 성향이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금세 친해지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보면 ‘익숙함’에 대한 선호도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 답이 무엇이든, 가정의 달 5월을 열며 내가 ‘닮음’을 주제로 묵상하고픈 것은 사실 원인보다는 대상이다. ‘누구를, 그의 무엇을 닮는 것이 기쁜 일일까’ 하는 질문 말이다. 가족과 친구들끼리의 ‘닮음’과 ‘익숙함’의 공동체적 범위를 넘어서는 한 대상을 떠올리고 있음이다. 맞다. 신앙의 독자들이니 충분히 유추하셨을 거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거다. 영이신 하나님이 어찌 생기셨는지 누구도 알 방도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형상을 그려갈 수 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보면 모두가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어도 대략 누가 가족인지 알 수 있는 ‘유사성’이 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가족 유사’라고 했다.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그리스도를 맏이로 믿고 따르는 형제자매들이라면 우리들 역시 닮아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족 유사’를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단박에 “아,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의 형제자매들이구나!” 금세 그 ‘닮음’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누가 봐도 딱 가족 같은 그런 닮음이 있는가? 가정의 달에 묻게 되는 질문이고 주를 닮고자 하는 결심이다.
백소영 (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