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은 예수를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도 그를 알았습니다. 단지 세례요한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뒤늦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셨습니다. 또 성령이 내려서 누구의 머리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는데 성령이 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세례요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도 예수님을 압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압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도 압니다. 그러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만난 세례요한의 인생관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본문이 요한복음 3장 30절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은 메시야이신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로 보내졌습니다. 이후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준비자는 사라져야 하고, 오시는 분은 드러나야 합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3장 26절에는 세례요한의 제자가 그에게 사람들이 모두 예수께로 간다고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답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쇠할 수 있습니까?
세례요한의 외침은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세례요한에게 그리스도는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이게 반응의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성경 속 다른 이들도 세례요한같이 생각했습니다.
바울도 예수를 핍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핍박한 이유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됐고 다시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도 이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하게 했던 배경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그 후 바울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요? 사도행전 21장 8절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바울을 붙들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말에 성도들이 올라가지 말 것을 간청합니다. 바울이 답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이 어떻게 이러한 사람이 된 것입니까?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압니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아는 자로 살고 있습니까? 신앙적으로 잘못된 듯싶은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은 옳은 것인데 지적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고 거룩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흥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쇠하여도 좋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신지 알기에 바르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불신앙에 대해선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선 꺾이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면 압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자존심을 누를 수 있습니까?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임의 표입니다.
“그리스도는 흥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활용하고 희생시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고 있습니까? 이 시대에는 교회 안에 어떠한 모습의 사람들이 많을까요? 누구라 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유영권 목사(천안 빛과소금의교회)
◇천안 빛과소금의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교단에 소속된 교회입니다. 1998년 1월 유영권 목사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린 뒤 2003년부터는 서북구 두정동에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해석되고 선포돼야 한다는 목회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양육과 훈련사역을 통해 목회자 같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