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재산권(IP)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시대가 열린다.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금융 당국이 은행권에 ‘지식재산권 대출’ 활성화를 독려하면서 시중은행이 관련 상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지식재산권은 영화, 게임 등 창작물의 ‘저작권’과 발명품, 특허권 등에 부여되는 ‘산업재산권’을 통칭하는 용어다. 기술력은 있지만 마땅한 담보가 없는 스타트업에 자금이 흘러가도록 ‘물꼬’를 터주는 것이다.
지식재산권의 가치를 인정받아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 10일 출시한 ‘신한 성공두드림 지식재산권 담보대출’의 1호 고객이 나왔다고 30일 밝혔다. 공기청정기·정수기 필터 등을 생산하는 제조업체 쓰리에이씨가 주인공이다. 쓰리에이씨가 ‘담보’로 내놓은 기술의 가치는 약 15억원이다. 기술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외부 기술평가기관은 물론 은행 내 변리사, 공학박사 등 내부 전문인력이 총동원됐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앞으로도 중소기업의 우수한 기술력을 판단해 자금 공급이 적시에 이뤄지도록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3월 지식재산권 보유 기업에 대출 혜택을 주는 ‘우리CUBE론-X’를 내놓았다. 지식재산권 가치를 감정하는 데 드는 비용은 은행에서 부담한다. 4대보험 도입, 일자리 지원 여부 등에 따라 최대 0.4% 포인트의 우대금리도 준다. KEB하나은행도 ‘KEB하나 지식재산권 담보대출’을 선보였다. 대출기간과 상환 조건 등을 기업 특성에 따라 ‘맞춤형’으로 제공할 방침이다. KB국민은행과 NH농협은행도 지식재산권 담보대출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은행들이 지식재산권 담보대출을 시도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2014년 전후로 지식재산권 대출 상품을 내놨다. 다만 1년도 되지 않아 판매를 접었다. 지식재산권은 부동산과 달리 가치 평가가 쉽지 않다. 기업의 부실 위험성도 높아 리스크 관리가 어려운 ‘고난도’ 대출로 꼽힌다.
그러나 최근 금융 당국이 드라이브를 걸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인센티브 경쟁’도 불이 붙었다. 금융 당국은 은행권의 ‘기술금융 실적’을 평가할 때 지식재산권 담보대출을 별도 집계해 경영 평가에 반영할 방침이다. 은행의 대출 회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회수지원사업’도 특허청과 함께 추진할 예정이다.
금융권 일각에선 혁신기업 지원이라는 취지는 좋지만 ‘질적 성장’도 고려해야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식재산권 담보대출의 리스크 관리방안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양적 성장’에 치우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 ‘녹색성장’ ‘창조경제’ 등 정부 기조에 따라 시행됐다가 흐지부지됐던 전례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자산건전성 관리를 위해 지식재산권 감정 기준을 고도화하는 게 향후 은행권의 과제”라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