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석의 염’ 표명한 일본의 양심… 왕세자에게 평화 대물림

입력 2019-05-01 04:01
아키히토 일왕이 30일 도쿄 왕궁인 고쿄 내 영빈관 마쓰노마에서 열린 퇴위식에서 마지막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퇴위식에는 일본 왕실 인사들과 아베 신조 총리 등 정부 각료, 국회의장단, 지방자치단체 대표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미치코(오른쪽) 왕비가 일왕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은 5월 1일 새 일왕에 즉위하는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 AP뉴시스

아키히토(明仁) 전 일왕은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에 대한 반성을 적극 강조하며 일본 정치권의 보수화, 우경화 경향을 우회적으로 비판해 왔다. 일왕 가문의 고대 조상 가운데 한국계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파격적인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아키히토는 ‘통석(痛惜)의 염(念)’ 발언으로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90년 일본을 국빈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맞아 “귀국 국민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면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84년 히로히토 일왕의 ‘유감(遺憾)’ 발언보다는 강도가 높았으나 표현이 애매모호해 제대로 된 사죄가 아니라는 비판이 많았다. 아키히토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때가 있었다. 그 슬픔은 항상 본인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재임 기간 동안 한·일 과거사 관련 메시지를 여러 번 내놨다.

일왕 가문에 백제 혈통이 섞여 있음을 스스로 인정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아키히토는 2001년 기자회견에서 “나 개인적으로는 간무 천황(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으로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백제와 일본 왕실 간 혈연관계는 역사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현직 일왕이 스스로 밝힌 건 매우 이례적이었다.

아키히토는 정치 개입을 할 수 없는 신분적 한계 속에서도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2011년 “일본이 지난 역사를 되새겨 평화를 생각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2013년에는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을 염두에 둔 듯 “평화와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며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일왕으로서 마지막으로 가진 생일 기자회견에서는 “재임 중에 전쟁이 없어서 안도한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평화헌법을 고쳐 ‘전쟁 가능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야심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아키히토의 뒤를 잇는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는 역사인식 측면에서 아버지와 큰 틀에서 생각이 같은 것으로 평가된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는 30일 “나루히토 왕세자는 한·일 관계와 평화헌법 유지에 긍정적인 발언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가쿠슈인 대학에서 역사학 석사학위를 받는 등 역사에 조예가 깊어 균형감각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헤이세이(平成) 시대 31년은 일본인들에게 암울했던 시기로 기억에 남을 전망이다. 아키히토가 즉위한 1989년은 30년 넘게 지속되던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이 꺾이고 ‘잃어버린 10년’으로 접어드는 전환점이다. 청년실업과 저출산 고령화, 인구 감소는 헤이세이 시대를 상징하는 사회현상이다.

조성은 최승욱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