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비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순례자의 축복 같았다. 지난달 26일 애국지사 벽파 김우종 목사의 삶의 흔적을 따라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홍천강가에 섰다. 묵상하기 좋은 곳이었다. 홍천강 하구는 북한강과 합수되는 지점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26일 아침 군은 “아군이 적을 격퇴했다. 춘천 시민은 동요 말고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하라”고 거리방송을 했다. 그런데도 이튿날 춘천 시내에 포탄이 떨어졌다. 다들 피난에 나섰다. 당시 강원일보 사장이었던 김우종은 직원들에게 피난을 명령하고 고향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향했다. 보리울이라 불리던 곳이다.
28일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됐다. 그때 춘천 살던 김우종의 조카가 허겁지겁 모곡리로 달려와 ‘목사이자 반공산주의자인 김우종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고 전했다. 그는 아내와 네 자녀 등을 앞세우고 이곳 송산리로 피난했다. 포악자의 기세가 성벽에 충돌하는 폭풍과 같은 때(사 25:4)였다.
송산리는 그때 물뫼라 불렸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심산유곡이었다. 김우종은 보리농사로 연명하는 외가 사촌 누이에 기대어 폭풍을 피했다. “아내와 고구마 빈 밭을 호미로 캐며 ‘이삭’을 주워 연명했다”고 회고했다. 그 물뫼는 수상레저 공간이 됐다.
인민군에 쫓겨 홍천강가로 피신
김우종은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강원도 위원장에 추대됐다. 독립운동가 한서 남궁억(1863~1939)이 세운 홍천 모곡학교 출신으로 배재학당과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정의 긍휼 믿음’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왔다.
앞서 그는 해방 정국에서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 춘천중앙교회 지하에서 강원도치안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여운형 안재홍 등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지방조직인 셈이다. 하지만 건준은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심지어 좌익이 미 군정에까지 파고들었다. 그는 정적들에 의해 미 군정 반대론자로 지목돼 6개월간 투옥생활을 했다. 사분오열된 해방 후 정국이었다.
정의 긍휼 믿음. 그의 이러한 정신은 3·1운동 직후 낙향한 남궁억 선생이 세운 모곡리 한서교회에서 형성됐다. 교회는 기도처이자 학교였고 신문물을 익히는 문명의 창구이기도 했다. 남궁억은 “조선 독립은 반드시 될 것이니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궁억이 1922년 작사한 찬송가 ‘일하러 가세’는 바로 여기서 나왔다.
지난주말 찾은 보리울 한서남궁억기념관은 쌀쌀한 날씨 때문에 한산했다. 봄비에 무궁화 묘목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기념관, 복원 모곡학교, 한서교회가 공원을 이뤘다. 어린 김우종은 이곳에서 ‘동사략’ ‘조선이야기’ 등 남궁억 선생의 저서를 석유등 불 아래 베끼어 쓰며 익혔다. 또 무궁화 묘목도 심었다. 그는 춘천지방 선교사 스톡스(한국명 도마련)에게 세례를 받았고, 1923년 이 학교를 졸업했다.
기념관 정원엔 골리앗에게 물맷돌을 던지는 소년 다윗의 형상이 세워져 있다. 일제에 의해 모곡학교가 폐쇄되고 교회가 문을 닫는 비극이 이어졌음에도 믿음과 배움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간 김우종과 같은 청년들이 물맷돌 소년 정신을 이어갔다.
김우종은 서울 배재학당으로 출향하여 학업과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가 처음 갇힌 것은 서울YMCA 주최 웅변대회에서 일제를 비난했기 때문이다. 일경이 웅변을 중단시켰고 한 달여 구류를 살았다. 상급학교인 연희전문(연전)에 입학해서도 광주학생항일운동 지지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갇혔다. 풀려나서도 전국웅변대회에 나가 “만장의 청년들이여 우리 청년은 하나요 둘이 아니다”라고 외쳤다가 또다시 형사들에 의해 끌려나갔다. “저놈을 죽여라”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사흘 후 그는 석방됐다. 훗날 그는 “우리 민족은 말라가는 논바닥에 갇힌 올챙이처럼 발버둥을 치는 신세였다”고 기록을 남겼다.
연전 졸업 후 그는 현 서울 연세대 부근 자연부락에 동민학교를 세우고 문맹자를 가르쳤다. 모곡학교에서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서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습격해 일본제국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했다. 29일의 구류를 살았다.
김우종은 1933년 난징 금릉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독립운동가 여운형도 이 학교 신학부에서 수학한 바 있다. 이 젊은 청년을 중국 망명 임시정부가 접촉했다. 그는 신익희 김규식 김두봉 등과 함께하며 조국의 미래를 위해 일했다. 그는 이때 기독교계 애국 투사를 규합하는 업무와 독립운동가 자녀 한글·역사교육에 힘썼다. 훗날 북한 연안파 거두가 된 김두봉의 부인이 일본 밀정 노릇을 해 자신이 가르쳤던 그의 딸 자매로부터 배척당한 뒷얘기 등을 남겼다.
김우종은 1936년 8월 목포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체포되어 목포경찰서에서 2개월여를 갇혀 지냈다. 양팔이 뒤로 묶인 채 공중에 매달려 고춧가루 물고문을 당했다. 임정 활동 내용과 동지들을 밀고하라는 고문이었다. “하나님의 가호를 믿으며 기도했다. 그때마다 주님의 십자가가 눈앞에 나타나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끝까지 견뎠다.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남궁억 제자, 바울처럼 매 맞고 갇히다
출옥한 그는 평양 성화신학교와 산정현교회 등에서 목회했다. 하지만 1941년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친일 아첨배들이 독립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밀고 아닌 밀고를 한 것이 더 분했다”고 술회했다.
이렇게 살았던 김우종은 정작 해방된 조국에서마저 친일 세력에 의해 수감당하고 제거됐다. 반민특위 도위원장 재직 중 친일부역 세력이 심은 스파이에 저격 직전까지 갔다. 특위 특경 대장은 친일부역 경찰에 의해 갇히고 끝내 자백서를 쓰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의문의 죽음이었다. 서울 중앙본부 반민특위도 친일부역 세력에 끝내 와해했다.
그는 바울처럼 순교하고자 했으나, 갇히고 매 맞으며 살아남았다. 그 공로로 1977년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 무렵 그가 한 방송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우리 민족 위에 항상 충만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통일운동과 도덕재무장운동, 백범과 한서 기념사업을 놓지 않았다.
홍천·가평=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