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오션’으로 꼽히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에서 한국의 ‘기술 선도국’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잇따른 화재로 지난 1월 가동 중단 조치를 내린 뒤로 전국에 설치된 ESS 가운데 절반이 4개월째 멈춰 서 있다. 관련 업계는 올해 들어 단 1건도 수주를 하지 못하면서 고사 위기에 몰렸다. 지난달 재가동을 전망했던 정부는 아무런 말이 없다.
여기에 이달 중으로 정부가 내놓기로 한 ‘국가 에너지 효율 혁신 전략’은 표류 중이다. 혁신 전략의 중심에 ESS가 있다 보니 발표를 미루는 것이다. 글로벌 ESS 시장은 2020년 58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만 뒤처지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29일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이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달 현재 전국에 설치된 ESS 1490기 가운데 747기(50.1%)가 가동 중단된 상태다. 산업부는 지난 1월까지 21건의 화재가 발생하자 가동 중지라는 초유의 조치를 발동했다. 가동을 멈춘 ESS 가운데 345기는 화재가 났을 때 인명 피해가 우려되는 백화점, 공항, 병원 등에 설치돼 있다. 나머지는 태양광·풍력용 설비다.
산업부는 당초 지난달까지 ESS 안전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었다. 약속했던 기한이 지났지만 예고했던 ‘기준’은 감감무소식이다. 업계 관계자는 “안전 기준이 없어 시공이 불가능하다보니 올 들어 4개월째 수주 건수가 없다”며 “이러다 다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정부가 안전 기준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화재 원인을 못 찾고 있어서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ESS 화재사고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원인 규명에 나섰다. 하지만 재연 실험에서 차질을 빚으며 지난달로 예정됐던 결과 발표는 다음 달로 미뤄졌다.
업계에서는 화재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지목한다. 우선 부실 시공이 꼽힌다. ESS는 시공업체가 배터리를 구매해 현장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구축한다. 한국조명전기설비학회는 2017년 춘계 학술대회 논문집에서 “전기공사업 자격을 보유하지 않은 업체에서 현장 설치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관리 부실도 유력한 원인 중 하나다. ESS 777기(52.1%)는 태양광·풍력 연계형이다. 산간벽지에 있는 재생에너지 발전설비의 한켠에 ESS를 설치해 무인으로 관리한다. 습도·온도에 민감한 ESS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원인 규명이 지연되면서 이달 중 발표하려던 국가 에너지 효율 혁신 전략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산업부는 2040년까지 적용할 ‘3차 에너지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에너지 효율 혁신 방안의 하나로 ESS를 꼽았다. ESS를 확대 보급해 ‘저효율 다소비’ 구조를 뜯어고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기본 구상이 틀어진 것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6~7월에나 발표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했다.
상황이 꼬이면서 글로벌 ESS 시장에서 한국의 지위도 위태롭다. LG화학, 삼성SDI가 지닌 ESS 배터리 기술은 세계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는다. 글로벌 ESS 시장은 연평균 13.5% 성장이 예상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보다 많은 실증이 필요한데 국내에선 설치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배터리가 화재 원인으로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비판했다.
세종=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