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성 질환에 야박한 산재보험… 뇌출혈 쓰러져도 개인질환 치부

입력 2019-04-30 04:03

N게임회사에 다니는 A씨(34)는 지난해 목 디스크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보통 오전 9시30분 출근해 저녁 8, 9시까지 일한다. 게임 출시를 앞두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동안 오후 11시가 넘어 퇴근한다. 주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됐지만 회사에서 출퇴근 시간을 입력할 때 52시간을 넘지 않도록 막아버려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목 디스크는 과로 탓인게 확실했지만 산업재해 보상보험을 신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나마 규모가 큰 회사라 회사에서 가입한 실손보험으로 치료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과로로 질병을 얻는 사람들이 많지만 산재보험이 치료를 충분히 보장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9일 ‘과로사 예방 및 보상 정책의 현황과 정책 과제’ 보고서에서 “엄격한 인정기준과 제한된 보장성 등으로 인해 산재보험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A씨가 앓은 디스크는 근골격계질환으로 업무상 질병 승인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반면 2017년 노동자 3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뇌심혈관질환은 개인질환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아 승인율이 매우 낮다. 한 뇌질환 관련 커뮤니티에는 “아버지가 20년간 택시운전을 하다가 운전 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산재를 신청하려 했는데 회사에서 개인질환이라고 거절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강모열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고령이거나 고혈압, 당뇨 등의 병력이 있으면 뇌·심혈관질환은 산재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산재보험 혜택을 받아도 보장이 제한적이다. 산재보험은 건강보험의 요양급여 기준을 따르고 있어 건강보험에서 비급여 항목은 산재보험에서도 대부분 비급여다. 이로 인해 산재 근로자는 평균적으로 치료비의 20%를 본인이 부담한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보고서 작성자인 정연 부연구위원은 “근로자의 불찰이 아닌 근로로 인한 질병인데 비급여 항목이어서 충분한 치료를 못받는 건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의 급여 범위를 달리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보사연 보고서는 또 “과로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여러 조치가 있지만 사업주 자율에 맡겨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근로자가 1개월간 주당 평균 52시간 넘게 일하면 사내 보건관리자(의사)가 면접 지도 등을 실시하게끔 하는 지침과 관련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관계자는 “지침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의무가 아닌 권고사항”이라고 했다.

또 다른 예방조치인 ‘뇌심혈관질환 예방을 위한 발병위험도 평가 및 사후관리지침’은 법적 의무사항인데도 처벌 조항이 부재해 강제성이 없긴 마찬가지다. 사업주는 장시간 근로, 야간작업을 포함한 교대작업, 차량 운전 등 직무 스트레스가 높은 근로자를 대상으로 2년에 1회 이상 근로자의 뇌심혈관질환 발병 위험을 평가하고 이에 따른 사후관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사업주가 지침을 시행하지 않아도 정부는 이를 지도, 감독할 권한이 없다.

중·소규모 사업장은 규정상 지침 시행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보고서는 “장시간 근로가 더 많은 50인 미만 중·소규모 사업장에서 보건관리자 선임은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보건관리자가 없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으로 지침을 이행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